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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자전거는 왜 앞바퀴만 큰 걸까?

자전거 사람이 타고 앉아 두 다리의 힘으로 바퀴를 돌려서 가게 된 탈것. 안장에 올라앉아 두 손으로 핸들을 잡고 두 발로 페달을 교대로 밟아 체인으로 바퀴를 돌리게 되어 있다. 바퀴는 흔히 두 개이며 한 개짜리나 세 개짜리도 있다 -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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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1 최초의 자전거는 댄디의 필수 아이템

1815년 인도네시아 탐보라 화산이 폭발하면서 전 지구적인 기후 변화가 있었습니다. 이 대재앙으로 사료가 부족해져 말이 떼죽음을 당하자 독일의 카를 폰 드라이스Karl von Drais의 발명품이 주목받기 시작하죠. 1817년 드라이스는 달리는 기계Celerifere 를 발명합니다. 이 기계는 철제 프레임에 핸들과 두 개의 바퀴를 앞뒤로 장착한 것으로 발로 땅을 구르며 가는 형태였어요. 드라이스는 이 기계를 타고 우편 마차로 4시간이 걸리던 거리를 1시간이 안 되어 왕복하면서 명성을 얻기 시작했죠. 신문에서는 이를 드라이지네Draisine 혹은 ‘빠른 발’이라는 뜻의 벨로시페드Velocipede 라고 불렀습니다.
달리는 기계의 주된 이용자는 댄디들이었어요. 어느 날 댄디이자 풍자 만화가였던 로버트 크록생크Isaac Robert Cruikshank 가 드라이지네를 타다 사고를 당합니다. 그는 이 사고 이후로 댄디를 풍자하는 캐리커처를 그렸고 드라이지네에 대한 대중의 인식이 부정적으로 바뀌게 됩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몇몇 국가에서는 위험성 때문에 인도에서 자전거를 타지 못하게 단속하기 시작했고 드라이지네는 점점 사라지게 됩니다.

Fig.2 페달 달린 자전거

드라이스가 생긴 지 50여 년이 지난 후에야 페달이 장착됩니다. 그 시작에는 프랑스와 미국의 의견이 다른데요. 프랑스는 1861년 프랑스의 마차 수리공인 피에르 미쇼Pierre Michaux 와 그의 아들 어니스트 미쇼Ernest Michaux 가 손님이 맡긴 드라이지네를 수리하다 개발했다고 하고, 미국에서는 1866년 등록된 특허를 기반으로 이민자 피에르 랄르망Pierre Lallement 이 만들었다고 보고 있죠.
페달 달린 자전거인 '크랭크 벨로시페드'를 홍보하기 위해 1868년 프랑스에서 자전거 경주가 시작됩니다. 이 때문인지 크랭크 벨로시페드는 큰 인기를 끌었고, 교습 학교가 우후죽순으로 생겨났어요. 체조장이나 롤러스케이트장을 개조해 자전거 교습 공간을 마련했으며 이곳에서 자전거를 대여해 주기도 했습니다. 자전거는 노동자의 두세 달 월급과 맞먹는 금액이었는데 대여 시스템 덕분에 많은 사람이 유행에 동참할 수 있었죠.

Fig.3 끝없이 커지는 자전거 바퀴

당시 자전거는 페달과 앞바퀴가 연결된 형태였는데요. 그러다 보니 앞바퀴가 크면 클수록 더 빠르게 달릴 수 있었죠. 게다가 자전거의 질량은 속도에 큰 영향을 주기 때문에 뒷바퀴는 점점 작아졌습니다. 이렇게 앞바퀴가 크고 뒷바퀴가 작은 자전거를 하이휠 바이시클High-Wheel Bicycle 이라고 불렀어요.
당시에는 바퀴를 나무로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나무로는 앞바퀴를 크게 만드는 데 한계가 있었죠. 1869년 외젠 마이어Eugène Meyer 가 장력을 이용해 가벼운 강철 휠을 만들면서 지름 90㎝였던 자전거 바퀴의 크기를 키울 수 있었습니다.
앞바퀴가 점점 더 커지면서 생기는 문제도 있었는데요. 하이휠 바이시클은 앞으로 엎어지기 쉬웠고, 타고 내리기가 어려웠죠. 이러한 이유 때문인지 1880년대부터 자전거의 인기는 시들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게다가 도심에서는 여전히 자전거가 금지였는데요. 자전거를 타기 위해 라이더들은 협회를 결성해 근교로 떠났죠. 이들은 유니폼을 입고 선두에 선 리더의 나팔 신호를 따르며 라이딩을 즐겼어요. 이러한 라이딩 문화는 철도가 생기면서 손님을 잃은 시골 경제 활성화에 도움이 되었다고 합니다.

Fig.4 안전한 자전거

이 시기에는 위험한 하이휠 바이시클을 대체하는 다양한 자전거가 탄생합니다. 세 바퀴, 네 바퀴가 달린 자전거, 사이드카와 비슷한 자전거 등이 있었죠. 그러다 사람들은 체인을 이용해 변속비를 키우면 바퀴의 크기를 줄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이러한 개념을 이용한 자전거는 1884년에 탄생한 이른바 ‘캥거루’인데요. 캥거루는 체인을 이용해 앞바퀴의 크기를 줄인 안전한 자전거였습니다. 게다가 뒷바퀴로도 구동할 수 있었고, 심지어 양쪽의 크랭크 드라이버를 뒷바퀴 앞쪽에서 하나로 모을 수도 있었죠. 자전거 경주에서 캥거루가 하이휠 바이시클의 기록까지 깨자 낮은 차체의 자전거가 인기를 얻게 됩니다.
1887년에는 공기 타이어가 도입됩니다. 아일랜드 더블린의 수의사 존 보이드 던롭John Boyd Dunlop 이 개발했는데요. 이로써 낮은 차체의 자전거에서도 좋은 승차감을 유지할 수 있었죠.
1956년에는 알렉스 몰턴Alex Moulton 이라는 기술자가 소형차인 모리스 미니의 고무 서스펜션을 자전거에 활용하자는 아이디어를 냅니다. 이 아이디어를 기반으로 1962년 몰턴 미니Moulton Mini 가 탄생했고, 대성공을 거두었죠.

Fig.5 세계 최대 자전거 대회는 정치 싸움에서 시작

한 달 동안 프랑스를 돌며 경주를 하는 ‘투르 드 프랑스Tour de France’의 탄생에는 드레퓌스 사건이 영향을 미쳤습니다. 드레퓌스 사건은 1894년 반역죄로 체포된 유대인 장교 드레퓌스를 두고 프랑스 전체가 드레퓌스의 무죄를 주장하는 드레퓌스파와 그 반대파로 나뉜 사건입니다.
당시 프랑스 스포츠 신문 《르 벨로Le Vélo》의 편집장은 드레퓌스 파임을 고백했죠. 그러자 반대파인 드 디옹 부통de Dion Bouton 백작과 아돌프 클레망Adolphe Clément 이 《로토 벨로L’Auto-Vélo》를 창간해 《르벨로》의 독자와 광고를 빼앗아 드레퓌스파를 망칠 궁리를 했어요. 그중 하나가 ‘투르 드 프랑스’ 였죠.

Fig.6 장군님 자전거 타신다

축지법(?) 쓰신 윤치호
우리나라에 최초로 자전거가 들어온 시기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미국 공사관 무관이었던 해군 장교 조지 클레이턴 포크George Clayton Foulk 가 1884년 제물포에서 서울까지 자전거를 타고 왔다는 기록과 미국 선교사 다리지엘 벙커Dalziel A. Bunker가 1886년 자전거를 탄 기록이 전해지고 있죠. 당시 자전거는 ‘개화차’ 혹은 가마꾼 없이 스스로 가는 수레라고 해서 ‘자행거’라고 불렸습니다.
독립 협회 회장으로 유명한 윤치호는 자전거의 선구자였습니다. 그의 연설회장에는 연설이 아니라 자전거를 구경하러 오는 사람이 더 많았다는 소문이 퍼질 정도였죠. 윤치호는 축지법을 쓴다는 소문이 있었는데 이는 자전거를 탔기 때문에 생긴 일화인 듯합니다.

Fig.7 자전차왕 엄복동

1903년 대한제국이 조정의 관리들을 위해 100대의 자전거를 도입하면서 자전거는 점점 사람들의 일상에 스며들기 시작합니다. 1906년에는 자전거 경주가 생기고, 1907년 이후 한일 선수들 간의 경주 대회가 열렸죠. 특히 1913년 서울 용산 연병장에서 열린 자전거 경주 대회에서는 10만 관중이 열광하는 가운데 엄복동과 황수복이 우승하면서 자전거 경주는 국민 스포츠 반열에 오릅니다.
엄복동은 1920년 경성 시민 운동 대회에서 우승하면서 본격적으로 이름을 떨치기 시작합니다. 이후 ‘조일 일류 선수권 대회’, ‘조선 일류 선두 책임 경주 대회’, ‘일류 20바퀴 경주’ 등에서 연승했어요. 1932년에는 최초의 한국인 주관 자전거 대회인 ‘전조선남녀자전거대회’에서 41세의 나이로 우승을 거두었죠. 일본인 심판들이 그의 우승을 막기 위해 경주를 중단시킨 적도 있었는데, 이에 화난 엄복동이 우승기를 꺾어 버려 일본인들에게 몰매를 맞기도 했습니다.

Fig.8 국내 최초 자전거 생산업체 삼천리

자전거의 바퀴를 만드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작업이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1947년부터 정부 지원 하에 자전거 자체 생산을 시도했지만 번번히 실패했어요. 그러다 6‧25 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삼천리 자전거의 전신인 기아 산업 부산 공장에서 생산에 성공합니다. 시기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인지 자전거의 명칭은 국토 통일의 뜻을 지닌 삼천리호가 되었.

Fig.9 남부순환로와 강남대로에 있었던 자전거길

1950년대에는 기름 사정이 좋지 않아 정부에서 자전거 타기를 장려했어요. 1960년대 중반에는 새생활운동을 통해 자전거 타기가 전국으로 확산되었죠. 그럼에도 자동차의 확산세로 인해 자전거의 이용은 계속해서 줄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1970년대에 발생한 오일 쇼크의 여파로 다시 자전거 타기 캠페인이 벌어집니다. 1975년 영동지구 간선 도로에 이어 경수국도와 남부순환로에 자전거 전용 도로가 건설되었어요. 물론 자동차에 다시 밀려 1988년 남부순환로와 강남대로의 자전거 도로는 철거되었습니다.

Fig.10 엄복동의 의지를 계승한 민족

20세기 초중반까지 자전거는 고가품이었기 때문에 동서양을 막론하고 자전거 도둑이 흔했습니다. 하지만 자전거가 상대적으로 저렴해진 21세기에도 멈추지않는데요. 대표적인 사례가 공유 자전거라고 할 수 있죠. 1999년 군포시에서 25대의 양심 자전거를 비치해두었으나 한 달만에 모두 사라졌어요. 2000년에는 충남대 내에서 운행한 100대의 양심자전거가, 2001년에는 400대의 청주시민자전거가 사라졌죠.

Insight.

새로운 기술이 나올 때 대중들의 관심과 인식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의 관심을 끌게 하는 것은 스포츠만한게 없죠. 그리고 스포츠에 쓰이게 되면 안정성과 기능성에 대한 발전이 급속도록 이루어지고요. 자전거의 발전사도 이를 잘보여줍니다. 댄디들이 타는 패션 아이템일 때는 대중의 인식이 쉽게 변하고 기술의 발전도 없었는데, 자전거 경주로 자전거가 인기를 얻게 되면서부터는더 빠르고 안전하게 발전하고 꾸준한 대중들의 관심을 받을 수 있었죠.

Reference.

김동준. (2012). 자전거의 역사. 월간교통.
강준만. (2008). 한국 자전거 문화의 역사. 인물과사상.
*위의 책 링크로 구매가 이루어지면 저에게 소정의 수수료가 지급됩니다. 응원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