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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큰손이 있었다 / 국내 증권시장의 역사 ②

증권시장 증권의 발행ㆍ매매ㆍ유통 따위가 이루어지는 시장. 좁은 뜻으로는 증권 거래소를 이른다. -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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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6 국내 최초의 주식 큰손, 윤응상

재판받는 윤응상 ⓒ금융투자협회
1961년 박정희 대통령이 2년 후 정권을 민간에 이양하겠다고 발표했어요. 발표 직후 윤응상은 중앙정보부 정책연구실 행정관인 강성원 소령과 뒷거래를 합니다. 7억 환을 주면 군정에서 민정으로 정권을 이양할 때 필요한 1백억 환의 정치 자금을 마련해 주겠다는 거래였죠. 중앙정보부 관리관 실장인 정지원까지 합세해 세 사람은 1962년 자본금 5억 환 규모의 통일 증권을 설립했고, 이윽고 일흥 증권까지 설립합니다.
윤응상은 사보이호텔에 작전 본부를 차려 놓고 주가 조작을 시작했죠. 첫 번째 작전인 대증주 매수 포지션과 두 번째 작전인 한전주 헐값 매입에 성공합니다. 그리고 5월 윤응상의 통일 증권과 일흥 증권은 대증주 매수 작전을 시작하는데 태양 증권을 중심으로 한 매도 세력과 부딪힙니다. 두 세력은 일주일 동안 대립하다가 결국 매수 세력이 밀리게 됩니다. 당시는 대부분 투자 금액의 10% 증거금으로 거래했기 때문에 대규모 결제 불이행 사태가 발생하게 되었죠. 이를 대증주 파동이라고 부릅니다. 대증주 파동으로 인해 윤응상은 주가 조작 혐의로 재판을 받지만, 무혐의 판결을 받습니다. 윤응상은 이후에도 큰손으로서 시장에 영향력을 끼쳤죠.

Fig.7 경남아저씨, 건설로 흥하고 건설로 망하다

1973 공모주 청약 열풍 ⓒ길벗출판사
1962년 대증주 파동의 영향으로 197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증권 투자는 패가망신이라는 인식이 있었습니다. 1970년대 중반 공모주로 돈을 벌었다는 사람이 많아지면서 개인 투자자가 다시 주식 시장에 모여들었죠. 당시 정부에서 공모주 청약을 유도하기 위해 증권사에게 6개월 동안 공모가 이상으로 주가를 유지할 의무를 부여했고, 공개 기업의 주가는 상장되자마자 1.5~3배로 형성되었습니다.
공모주 청약으로 주식 투자를 시작한 사람 중에는 김영진도 있었습니다. 공모주로 재미를 붙인 그는 1976년부터는 직장을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주식 투자에 뛰어들었어요. 그는 경남 기업을 집중적으로 단기 매매하며 목돈을 만들었는데 이 때문에 ‘경남 아저씨’라고도 불렸습니다. 이후 김영진은 신문 기자 1명, 증권사 직원 1명, 중견 건설회사 임원 1명 등을 모아 투자 클럽을 만들었어요. 이들은 자금을 조성한 뒤 정보를 수집했습니다.
1976년 8월 클럽 멤버 중 한 명이 동아 건설이 큰 폭의 유무상 증자를 검토 중이라는 정보를 가져왔어요. 게다가 동아 건설 임원으로부터 ‘확정되지는 않았지만, 조만간 증자해야 할 상황’이라는 사실도 확인합니다. 클럽 멤버들은 동아 건설 주식을 3만 원 선에서 매입했고, 6만 원대에 전량 매도해 수익을 냈어요.
1978년 3월에는 ‘건설 산업이 사우디에서 대규모 수주를 딸 것’이라는 정보를 가져와 매입을 시작했죠. 하지만 당시 100% 유상 증자설이 돌았는데 막상 발표된 내용은 50% 유상 증자였고, 시장에 떠돌던 사우디 공사 수주설도 근거가 없는 것으로 밝혀집니다. 결국 주가는 급락해 건설 산업은 1980년 부도를 낸 뒤 다음 해에 거래소에서 퇴출되었죠. 김영진은 보유 주식이 모두 반대 매매 당하고 집과 상가 주택까지 처분해야 했습니다.

Fig.8 큰손에 손실입힌 큰손

구속되는 장영자 ⓒKBS
1982년 침체된 건설업에 갑자기 생기가 돌기 시작합니다. 바로 큰손 장영자가 움직인 것이었죠. 그녀는 국회 의원과 안기부 차장을 지낸 이철희의 부인이었습니다. 장영자는 자금난에 빠진 기업에 접근해 사채를 빌려주고 대여액의 2~9배에 달하는 어음을 받아 사채 시장에서 할인하는 방법을 반복해 총 7,111억 원의 어음을 유통시켰죠. 물론 이는 불법이고, 1982년 5월 장영자는 구속됩니다.
한편 그녀는 약 2천억 원을 증권에 투자하면서 큰손으로 등장합니다. 주로 건설주를 매수했어요. 폭락한 건설주의 주가가 움직이기 시작하면 높았던 주가를 기억하는 개인 투자자들도 따라올 것이라는 계산이었죠. 실제로 장영자가 주식을 매수하기 시작하자 6개월만에 약 3.5배까지 주가가 올라갔습니다. 하지만 건설업 경기는 계속 악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인위적으로 끌어올린 주가에는 한계가 있었고, 결국 건설주는 다시 폭락하게 되었죠.
장영자 파동으로 큰 손실을 입은 또 다른 큰손이 있었습니다. 바로 광화문 곰, 고성일 회장이었죠. 그는 1985년 기준 주식 시장에서 건설주를 가장 많이 가진 개인 투자자로 이름을 날렸습니다. 시세판에 게시되어 있는 건설주를 맨 위에서부터 맨 아래까지 10만 주씩 매수하라고 지시한 일화가 있어요. 1985년 그가 가지고 있던 건설주의 시가는 200억 원이 넘었다고 합니다. 건설주 다음으로 많이 가지고 있는 종목은 유공(현 SK이노베이션)으로, 120만 주를 보유했어요.

Fig.9 시황을 흔든 '피스톨 박'과 IMF가 낳은 슈퍼 개미

1990년대 외국인은 우리나라 주식의 소수 핵심주, 즉 블루칩만 골라 집중 매수했어요. 국내 기관들도 외국인을 추종해 자사 운용 펀드를 운용했죠. 그중에서도 제일은행 신탁운용부에서 주식 운용을 책임지던 박 차장이 유명했습니다. 그는 특정 블루칩을 선정해 무차별 매수한다고 해서 피스톨 박이라고 불렸죠. 심지어 그가 무슨 종목을 사느냐에 따라 시황이 달라질 정도였어요.
1997년 상황은 급변합니다. 차입에 의존해 몸집을 불렸던 대기업이 단기 차입금을 상환하지 못해 부도를 내기 시작했고 결국 IMF 외환위기가 찾아옵니다. 외인 자금은 한국을 떠났죠. 하지만 위기는 슈퍼 개미들이 탄생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대표적인 사례는 강방천 회장으로 그는 IMF 때 증권주를 매수해 20배의 수익을 냈죠.

Reference.

윤재수. (2021). 돈이 보이는 주식의 역사. 길벗.
황은주. (연도미상). 국가기록원. 개장에서 전면개방까지, 선직국 대열에 오르다. URL : https://theme.archives.go.kr//next/koreaOfRecord/stockMarket.do
임경오. (2005). 한국증시 110년 그 파동의 역사. 프라임경제 URL :http://www.newsprime.co.kr/news/article/?no=12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