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험실
실험을 하기 위하여 필요한 장치와 설비를 갖춘 방
-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Comment.
•
최근에는 계속해서 전자기기에 관련된 역사만 조사했는데요. <실험실의 진화>라는 책을 보다가 재밌어서 오랜만에 다른 주제를 정리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이 책을 꽤 오래 전부터 도서관에서 눈여겨 보고 있었는데, 전자기기의 역사만 조사하고 있었기 때문에 뒷 전으로 미루어 두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그냥 읽기만 해야지 했다가 결국 정리까지 해버렸네요.
•
실험실의 역사는 화학의 역사와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화학사는 한 번 정리한 적이 있습니다) 가장 인상 깊은 순간도 보일이 자신의 실험을 사람들에게 믿게 하기 위해 실험실을 개방하였다가,왜 과학자만을 위한 닫힌 실험실이 되었는지에 대한 내용입니다.
- 목차 -
Fig.1 최초의 실험실은?
최초의 실험실은 누가 만들었는지 확인하기 어렵습니다. 옥스퍼드 영어사전에 따르면 실험실이라는 단어를 처음 사용한 사람은 16세기 신비주의 철학자 존 디john Dee 인데요. 하지만 실험실laboratory 의 라틴어 어원인 라보라토리움laborarorium 은 16세기 이전부터 쓰였기 때문에 존 디가 실험실이라는 단어를 처음 쓴 사람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Fig.2 어둠의 연금술사 실험실
연금술사의 실험실은 주로 지하와 같은 어두컴컴한 곳에 있었습니다. 안드레아스 리바비우스Andreas Libavius 는 이점을 비판하며, 연금술이 지하 세상의 어두운 비밀을 몰래 탐구하는 활동이라며 비난했습니다. 반면, 리바비우스는 연금술과 대비되는 가상의 '화학의 집'을 제안했는데요. 화학의 집은 도심에 있었고, 커다란 창을 통해 들어온 빛이 내부를 환하게 밝혀주는 구조였습니다. 말하자면 연금술은 어둠의 학문이고, 화학은 빛의 학문이라는 것이죠. 이처럼 연금술은 화학자들과 종교인들에게 비난의 대상이었는데요. 금을 만들기 위한 목적이 탐욕스럽고 헛되다고 보였기 때문이죠.
하지만 사실 18세기 초엽까지 화학자의 실험실은 연금술사의 실험실과 큰 차이가 없었습니다. 두 실험실 모두 가장 중요한 기구는 화로와 증류기였습니다. 화로는 고온을 만들어서 금속을 녹이거나 증류를 하는 데 사용했고, 증류기는 불순물을 걸러내는 데 사용했죠.
18세기 중엽부터 화학 연구의 주류가 야금학이나 약제학에서 기체 화학으로 바뀌면서 화로의 중요도가 점점 줄어듭니다. 대표적으로 라부아지에Antoine-Laurent de Lavoisier 의 실험실을 보면, 화로는 없고 테이블 위에 각종 실험 도구들이 놓여있었습니다. 게다가 라부아지에의 실험실은 파리의 병기창에 있었고, 프랑스 정부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반면 동시대 프리스틀리의 실험실은 17세기의 연장선이었습니다. 집에 실험실을 두고 공기 수집기를 개량해서 실험했죠. 그래서 혹자는 프리스틀리를 최후의 연금술사라고 칭하기도 합니다.
Fig.3 프랜시스 베이컨과 실험의 등장
화학자의 실험실이 생겨났지만,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이 중심이 되는 중세에서는 실험 자체를 좋게 보지 않았습니다. 당시에 지식은 실험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대상의 본질을 사변적으로 생각함으로써 얻어지는 것이라고 받아들여졌죠.
그리고 당시 실험실의 필수품이었던 화로와 증류기도 비판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서는 자연의 모든 존재는 자연적인 운행을 하므로 인간이 개입하는 실험은 자연을 망친다고 보았는데요. 특히 자연에서 볼 수 없는 화로와 증류기를 사용한다는 점에서 더더욱 그랬죠.
16세기에 이르러서야 아리스토텔레스적 사고에 반기를 든 지식인이 등장하는데요. 바로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 이었습니다. 베이컨에게 지식은 대상이 무엇에 의해 일어나고 있는지 동적 원리를 탐구하는 것이며, 이를 알기 위해서는 실험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화로와 증류기에 대한 비난에 대해서는 베이컨은 실험이 인공적인 상태를 만드는 게 아니라 막고 있던 다른 요소를 치워줌으로써 자연 본래의 모습을 드러내는 작업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더 나아가 베이컨은 국가와 사회가 지원하는 공동 연구의 필요성을 이야기합니다. 베이컨의 저서 <새로운 아틀란티스>(1626)에는 솔로몬의 집이라는 공간이 등장하는데요. 이곳에는 36명의 연구원이 분업하여 연구합니다. 외국을 여행하며 정보를 수집하는 사람, 실험을 수집하는 사람, 실험을 수행하는 사람, 수집된 내용을 정리하는 사람, 실용적으로 응용할 방법을 찾아내는 사람, 새로운 실험을 연역하는 사람, 새로운 실험을 수행하는 사람, 이를 모두 취합하여 자연법칙을 이끌어내는 사람으로 나뉘어 합동 연구를 진행합니다.
베이컨의 이상이었던 솔로몬의 집은 1660년 왕립학회가 설립됨으로써 실현되었습니다. 이곳에서 과학자들이 모여 실험 결과를 발표하고 토론했죠. 하지만 조직적인 협동 연구가 진행된 것은 아니었고, 정부의 연구비 지원도 없었습니다.
Fig.4 실험을 믿게 하는 방법 - 열린 실험실
연금술사의 실험실은 비밀에 싸인 공간이었으며, 연금술사의 실험 노트는 본인이 아니면 해석할 수 없는 암호 문자를 사용했습니다. 반면, 근대과학자들은 실험이 공개적으로 검증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로버트 보일Robert Boyle 이었습니다. 그의 실험실은 모두에게 열려 있었고, 실험 결과를 책이나 논문으로 발표했죠. 다만 그의 실험을 직접 보지 않은 과학자들에게 어떻게 실험 결과를 믿게 할 것인지가 문제였습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보일은 세 가지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첫 번째는 많은 사람이 자신의 실험을 지켜보았다고 기록하는 것이었습니다. 보일은 수은주 실험에서 “유명한 수학 교수들, 월러스 박사, 와드 박사, 그리고 미스터 렌이 보고 있는 가운데 실험했다”며 이름까지 공개하기도 했죠. 보일은 독자들에게 자신의 실험을 목격한 사람들이 거짓말을 할 사람들이 아니라는 믿음을 심어주려고 한 것입니다.
두 번째 방법은 실험의 시시콜콜한 내용까지 전부 기록해서 보고하는 것이었습니다. 보일은 진공 속의 새에 대한 실험을 보고하면서, 공기를 빼니까 새가 발작을 일으키기 시작했고, 구경하던 한 사람이 실험을 멈추게 하고 새를 구해줬다는 이야기를 적었습니다. 이렇게 세세한 내용을 전부 기록함으로써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방증하는 것이죠.
세 번째는 실패한 실험까지 자세하게 기록하는 것이었습니다. 실패한 실험에 대한 상세한 보고는 성공한 실험에 대한 설득력을 높여주었죠.
하지만 보일도 아리스토텔레스 주의자들의 비판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 주의자들은 보일이 만든 진공이 인공적인 산물이라며 비판했습니다. 리바이어던으로 유명한 홉스Thomas Hobbes 도 실험이 과학적 사실을 만들어낸다는 주장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어떻게 실험이 완벽한지 확신할 수 있냐는 것이었죠. 따라서 홉스는 보일의 진공 펌프는 완벽하지 않기 때문에 공기가 새고 있고, 진공 속에서 새가 죽은 것은 숨을 쉬지 못해서가 아니라 진공펌프의 틈으로 공기가 급격하게 빨려 들어가 소용돌이를 일으켜 새를 죽인 것이 아니냐며 비판합니다. 이에 대해 보일은 새를 넣은 유리구 속에 작은 깃털 하나를 매달은 채로 진공을 만들었습니다. 홉스의 말대로 공기의 강한 소용돌이가 새를 죽인 것이었다면 깃털은 소용돌이 때문에 요동을 쳤을 테지만 미동도 하지 않았죠.
Fig.5 증인은 중요하지 않다 - 닫힌 실험실
보일의 진공 실험은 다음과 같습니다. 한쪽이 막힌 긴 유리관에 수은을 가득 채운 뒤 수은이 담긴 넓은 그릇 안에 거꾸로 세웁니다. 그러면 유리관 속 수은은 넓은 그릇 안으로 내려가다가 일정 높이에서 더 이상 내려가지 않죠. 이때 긴 유리관과 넓은 그릇 전체를 진공펌프 안에 넣고 공기를 빼내면, 넓은 그릇에 작용했던 공기의 압력이 약해지면서 긴 유리관 속 수은 기둥의 높이가 내려가게 됩니다.
보일의 실험이 화제가 되면서 당시 유명한 물리학자인 크리스티안 하위헌스Christiaan Huygens 도 보일의 실험을 재현해 봅니다. 그런데 진공을 만들어도 수은 기둥이 전혀 낮아지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하위헌스는 이 사례를 들면서 보일이 진공펌프를 통해 얻은 공간은 진공이 아니라고 비판했죠.
보일은 이 결과를 듣고 하위헌스가 만든 진공펌프가 불량이라 나타난 결과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하위헌스가 1663년 보일의 진공펌프를 가지고 자신의 실험을 재현하면서, 보일은 이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죠. 보일이 하위헌스의 실험 결과를 받아들였지만, 아직 믿지 않는 왕립학회 회원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을 대상으로 로버트 훅은 하위헌스의 실험을 재현합니다. 로버트 훅은 회합 장소로 실험 도구를 옮겨 실험을 재현했습니다. 실험 결과는 하위헌스의 결과대로였죠. 하지만 그럼에도 왕립학회 회원들은 실험 도구를 옮기는 과정에서 진공펌프의 밀봉에 문제가 생겼다고 생각했습니다. 결국 회합 장소가 아닌 로버트 훅의 실험실에서 실험 결과를 재현한 뒤에야 과학자들은 하위헌스의 실험 결과를 받아들입니다.
이 일을 계기로 실험의 신뢰도는 목격자의 존재와는 무관하다는 것이 드러났습니다. 실험실은 열린 공간일 필요가 없어졌죠. 실험실은 실험을 주도하는 과학자만의 공간이 되어 갔습니다.
Fig.6 대학교의 실험실
19세기 초반 유럽 대학에서는 실험실을 찾아보기 힘들었습니다. 당시까지도 대학의 주요 과목은 신학, 의학, 법학, 철학이었기 때문이죠. 19세기 말에서야 과학이 주요 과목이 되면서 대학 내에 실험실과 연구실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유기화학을 개척한 유스투스 폰 리비히Justus von Liebig 는 기센 대학교에서 실험 실습을 할 수 있는 실험실을 운영했는데요. 이 리비히의 실험실은 여러 대학 실험실의 모델이 되었습니다.
대학에 실험실이 자리잡게 되면서 어떻게 학생 여럿에게 동시에 같은 실험을 가르칠지에 대한 문제가 대두되었습니다. 네덜란드 레이던 대학교의 화학 교수 헤르만 부르하버Herman Boerhaave 은 많은 학생들이 동시에 실험을 진행하고, 안전하게 불을 사용할 수 있도록 작은 화로를 만들었습니다. 점차 큰 화로는 실험실에서 사라지게 되었고, 19세기 무렵 학생들은 화로 대신에 알코올 램프로 실험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Fig.7 물리학 실험실의 탄생
리비히의 실험실이 성공적으로 운영되면서 19세기 초엽 대학에는 화학 실험실이 정착했습니다. 게다가 인공 염료의 상업화로 대학뿐만 아니라 기업에서도 화학 실험실이 세워졌죠. 하지만 화학 외의 분야에서는 실험실이 좀 처럼 활성화되지 않았습니다.
대표적인 예로 18세기 후반 유행했던 전기 실험은 실험실이 아닌 살롱이나 귀족의 저택에서 진행되었죠. 대중강연으로 유명했던 험프리 데이비Humphry Davy 와 마이클 패러데이Michael Faraday 도 강연을 하는 극장의 무대 바로 옆에서 실험했죠.
물리학 실험실이 생겨난 계기는 전신의 발명이었습니다. 1830년대 새뮤얼 모스Samuel Morse 가 발명한 전신은 급속도록 발전해 1850년대 이미 해저 케이블이 깔리죠. 전신선은 수십에서 수천 킬로미터에 달했는데, 중간에 손상된 부분을 찾아내기 위해서는 표준저항이 필요했습니다. 따라서 표준 저항을 측정해서 만드는 것이 국가적 차원에서 중요한 일이 되었죠. 표준저항을 만들기 위해서는 외부의 교란 없이 정밀 작업이 가능한 실험실이 필요했고요.
그렇게 생겨난 물리학 실험실은 화학 실험실을 모방해서 만들어졌습니다. 그래서 물리학 실험실에서는 보통 강의실 바로 옆이나 밑에 있었고, 강의와 연계된 실험을 진행했죠. 하지만 이렇게 만들어진 실험실은 표준저항을 정교하게 측정하고 유지하는 데에는 적합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1874년 세워진 케임브릿지 대학교의 캐번디시 연구소는 1층과 3층에 연구 실험을 위한 실험실을 배치하고, 2층에는 학부생을 위한 강의실과 실험실을 지어 이런 문제를 해결합니다. 특히 정밀 실험실이 위치한 1층은 복도를 없애고 방과 방을 직접 연결함으로써, 학생들의 접근을 자연스럽게 차단했습니다.
Fig.8 생물학 실험실의 탄생
18세기 무렵 생물학 강의는 주로 대학교 박물관에서 진행되었습니다. 교수는 박물관에 있는 표본을 가져와서 강의했죠. 실험은 일부 교수가 알아서 장소를 마련해 하는 것이었습니다.
근대 실험생리학의 창시자로 알려져 있는 마장디Françosi Magendie 는 생리학에서 실험의 중요성을 강조했는데요. 이를 위해서는 동물실험을 위한 공간이 필요했습니다. 마장디의 제자이자, 췌장액의 기능을 밝힌 것으로 유명한 클로드 베르나르Claude Bernard 역시 마찬가지였죠.
하지만 마장디가 속했던 콜레주 드 프랑스Collge de France 는 생리학 연구에 실험실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 베르나르에게 충분한 실험실을 제공해주지 않았습니다. 사실 마장디의 동물실험은 비윤리적이라며 많은 비판을 받기도 했거든요. 결국 베르나르가 여러 정부 기관을 설득하는 오랜 노력 끝에 자연사박물관에 딸린 작은 부속 건물을 실험실로 제공받았는데요.이때는 생리학자로서 베르나르의 연구가 거의 끝나가던 때였죠.
케임브리지 대학의 마이클 포스터Michael Foster 는 교육과 생리학 실습을 병행할 실험실을 대학에 요구해 1873년 '기초 생물학에 대한 실제적인 수업'을 개설합니다. 이 수업에서는 다양한 동식물들을 해부 및 관찰했죠. 포스터는 학부생을 대상으로 실험을 통해 생물학을 가르친 최초의 과학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후 실험을 통해 생물학을 가르치는 방식은 서서히 여러 대학으로 확산해갔습니다.
포스터의 스승이었던 토머스 헉슬리Thomas Huxley 도 “과학 연구자에게는 실험실 작업이 중심이어야 하며, 책은 이를 도와야 한다"라며 실험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그는 1872년 영국 왕립 과학 칼리지의 교수가 된 후 학생들의 실험을 위한 공간과 예산을 확보해 생물학을 가르쳤죠.
Reference.
•
Lowe, D. (2015). Laboratory history: The chemistry chronicles. Nature 521, 422
•
Peter J. T. Morris. (2021). The history of chemical laboratories: a thematic approach. Chemtexts
•
홍성욱. (2020).실험실의 진화. 김영사
•
황상익, 김옥주. (1992). 19세기 서유럽 생리학의 전문과학화 과정. 의사학, 1(1), 36-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