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rch
☂️

우산쓰는 사람 = 차 못사는 사람?! / 우산의 역사

우산 우비의 하나. 펴고 접을 수 있어 비가 올 때에 펴서 손에 들고 머리 위를 가린다. 박쥐우산, 비닐우산, 지우산 따위가 있다. -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목차-

Comment.

뉴스레터를 최종적으로 편집하고 있는 23년 3월 12일은 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뉴스레터 주제로 우산을 수정하고 있었는데 마침 잘되었습니다.
저는 각 물건의 가장 오래된 브랜드의 제품을 사는 취미(?)가 있습니다. 우산은 폭스 엄브렐라 Fox Umbrella 가 1868년에 설립되어 가장 오래된 브랜드인데요. 문제는 꽤 비쌉니다.. 가격이 20만 원부터 시작해서 100만 원까지도 가더라고요. 아직 우산에 20만 원을 태울 만큼 용기는 나지 않아서 위시리스트에만 담아두었습니다.
이번 뉴스레터에서 수정한 내용은 많지는 않습니다. 프랑스에 대한 내용 추가가 가장 주된 업데이트이네요. 그런데도 뉴스레터 작성하는 데 시간은 왜 이렇게 많이 걸리는지 억울합니다. 참고문헌도 다시 한번 찾아보고, 책도 새로 구매했건만 막상 추가할 내용은 별로 없고.. 작성하는 데에는 조금은 힘 빠졌던 우산의 역사지만 그래도 재밌게 봐주시길 바라요.

Fig.1 막으라는 비는 안 막던 그 시절 우산

우산이 새겨져있는 크세르크세스의 조각
우산은 아주 오래 전부터 존재해 왔습니다. 기원전 500년경 페르시아 왕 크세르크세스 1세의 조각에서 파라솔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거든요. 중국에서도 기원전 25년 왕광의 무덤에서 접이식 파라솔이 발견됩니다.
고대의 우산은 실용적인 목적보다는 하늘, 권위, 죽음 등의 상징으로 이용되었어요. 우산은 신분을 드러내는 도구가 되기도 했습니다. 명나라 시기 황제는 커다랗고 붉은 비단 우산 2개를 들고 다녔고, 고위직은 붉은 비단으로 안감을 대고 주름 장식을 단 검은 우산, 양반은 조롱박 모양 주석 손잡이가 달린 붉은색 우산, 천민은 종이로 만든 우산을 사용했죠.

Fig.2 프랑스는 호, 영국은 불호

18세기 초에 만들어진 마리우스의 접이식 우산 Philippe Ladet / Galliera / Roger-Viollet
실용적인 우산이 언제 처음 등장했는지 확인할 수 없지만, 유럽에서 처음으로 등장한 것은 프랑스로 추정됩니다. 1680년 우산(파라플뤼, Parapluie)이 프랑스어 사전에 등재되었거든요.
프랑스에서 우산이 본격적으로 사용된 것은 장 마리우스Jean Marius가 우산을 개량하면서부터입니다. 장 마리우스는 원래 고급 핸드백을 제작했어요. 특히 가방을 여닫는 금속 장치를 만드는 데 전문가였죠. 그는 자신의 기술을 우산에 접목해 1705년에 우산을 제작합니다. 1709년에는 접이 우산을 개발하기도 하죠. 이 우산은 지금도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데 오늘날의 우산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장 마리우스의 접이 우산은 루이 14세의 눈에 띄게 되었고, 1710년 루이 14세는 장 마리우스에게 5년 동안의 접이 우산 생산 독점권을 줍니다. 루이 14세와 왕립 과학원의 극찬, 성공적인 광고 등으로 인해 우산은 귀족들의 필수품이 되었죠.
우산을 쓰고 있는 조나선 한웨이 ⓒcuriousrambler.com
반면 영국에서는 그로부터 50여 년이 지난 뒤 우산이 등장하는데 프랑스와 반응이 사뭇 달랐습니다. 조나스 한웨이Jonas Hanway라는 영국의 사업가는 1750년경 러시아와 중동을 여행한 뒤 영국으로 돌아오면서 진기한 물건들을 가지고 옵니다. 그중 하나가 페르시아에서 본 양산(우산)이었죠. 그는 영국에 와서도 옷이나 가발이 비에 젖는 것을 막기 위해 우산을 사용했는데 당시 런던 사람들은 그의 행동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야유를 보냈습니다.
우산을 들고 다니는 사람들은 하늘의 뜻을 거스르는 자, 건강을 지나치게 염려하는 망상자이거나 옷이 망가질까 봐 유난 떠는 사람 혹은 마차를 소유하지 못한 사람으로 봤어요. 당시에는 비가 오면 마차를 불렀거든요. 그럼에도 한웨이는 죽을 때까지 우산을 썼죠.
사실 우산이 영국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이유에는 사회적 인식 외에도 실질적인 문제가 있었어요. 보행로는 너무 좁아 한 명씩만 지나갈 수 있었고, 우산은 비싼 가격에 비해 질이 좋지 못했거든요. 초기 우산은 고래의 뼈로 만들어져서 무겁고 부러지기 쉬웠으며 천도 방수가 완벽하지 않아 젖기 일쑤였습니다.

Fig.3 계급별로 다른 우산

19세기가 되어서야 우산은 유럽 전반에서 인기를 얻게 됩니다. 그러면서 다양한 우산이 등장합니다. 향수나 필기구를 담을 수 있도록 속이 파인 손잡이가 장착된 우산, 커버에 커튼을 친 우산, 손잡이에 병이 달려 있어 고인 빗물을 담을 수 있는 우산, 접으면 커버와 우산살이 우산대 안으로 들어가 지팡이가 되는 우산도 있었어요.
당시 우산은 수제로 제작되어 신분과 취향을 보여 주는 사치품이었습니다. 1830년대부터 유럽에 중산층이 자리 잡으면서 상대적으로 저렴한 고품질 유사품이 늘어나기 시작하고, 불필요한 기능은 점차 사라졌어요. 그럼에도 19세기까지 우산을 보고 그 사람의 계급을 가늠할 수 있었습니다. 실크 우산은 귀족의 전유물이었고, 낮은 계급의 사람들은 면으로 만든 우산을 썼거든요. 실크는 면보다 깔끔하게 말렸기 때문에 우산 마는 방식이 사회적 지위를 상징하기도 했죠.
고래뼈 우산 ⓒnational museum of american history
우산의 수요가 늘자 공장형 생산 업체가 등장하기 시작했고, 기존 우산의 문제점들도 해결되기 시작합니다. 1848년 사무엘 폭스Samuel Fox가 강철 튜브로 만든 우산살을 도입해 고래 뼈 우산살의 무게와 내구성 문제를 해결했어요. 이 우산에 파라곤이라는 상표를 붙여 판매했죠.
1851년 런던에서 열린 만국 박람회에서는 윌리엄 생스터William Sangster가 알파카 직물을 사용한 우산을 선보여 수상했는데요. 알파카 천은 기존에 사용하던 실크나 면보다 훨씬 방수가 잘 되었죠.
사무엘 폭스와 윌리엄 생스터의 아이디어를 결합한 우산은 엄청난 인기를 얻으며 1855년에만 400만 개 가까이 팔립니다. 심지어는 나폴레옹 전쟁 당시 군인들이 전쟁터에도 가져갔다고 해요.

Fig.4 양산은 여성의 전유물?

고대 로마와 그리스 시대 때부터 양산은 여성만 사용하는 물건이었어요. 기원전 520년 아나크레온의 〈아테나이오스〉 서정시에는 아르타몬이라는 사람이 등장하는데, 여성처럼 양산을 사용한다고 조롱받았죠. 우산이 유행해 다양한 모습으로 등장하던 19세기에도 양산만은 여성용이라는 인식이 강했어요. 특히 빅토리아 시기에 양산은 레이스와 자수, 보석 등으로 장식되어 여성 패션의 핵심 아이템이었죠. 20세기 초, 양산은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화려해집니다. 심지어 양산 때문에 겁을 먹는 말이 생겨서 폴로 경기 전에는 양산을 숨기는 것이 예의일 정도였죠.
1922년에는 개 양산이 인기를 끌었습니다. 본래 개 양산이라고 하면 양산 손잡이에 개 머리 모양이 새겨진 양산을 의미하는 것이었는데요. 나중에는 정말 개가 사용하는 양산이 등장하면서 개를 위한 양산을 의미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때쯤이 되면 하얀 피부보다 햇볕에 그을린 피부가 인기를 끌면서 양산은 구닥다리 물건으로 취급되었죠.

Fig.5 3단 접이 우산

간지나는 신사용 3단 우산 ⓒ Knirps
광산 평가원이었던 한스 하우프트Hans Haupt는 전쟁의 부상으로 지팡이가 필요했습니다. 지팡이와 일반 우산을 동시에 들 수 없었던 그는 자신이 사용할 수 있는 우산을 발명하고자 1916년부터 접이식 우산을 공부하고 관련 기술을 여러 차례 개발해 특허를 냈죠. 그리고 1930년 마침내 3단 접이 우산을 발명합니다. 그는 자신이 만든 우산을 가지고 회사 크닙스Knirps를 설립했어요.

Fig.6 우리나라에서의 우산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로 우리나라의 우산은 양산을 겸한 의례용으로 먼저 등장합니다. 고구려 벽화에서 시녀가 일산(우산)을 상전에게 씌워주는 모습을 찾을 수 있죠. 고려 이후에는 장량항우산張良項羽傘 이 있었는데 볕을 가리는 양산과 우산을 겸한 것으로 신분이 높은 사람만 사용했어요.
반면 서민들은 우산을 사용할 수 없었습니다.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우산으로 막는 것이 하늘의 뜻을 거스르는 행위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그래서 우산 대신 짚으로 만든 도롱이와 삿갓으로 비를 피했어요. 더 나아가서는 기름종이로 만든 전모와 갈모를 이용하기도 했죠. 갓이 컸던 조선 후기까지는 갈모도 커서 몸을 모두 가릴 수 있었으나 말기에는 갓이 작아지고 갈모도 좁아져서 머리만 비를 피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신윤복 그림에서 나타나는 쓰개치마
조선 중기 이후 양반층 부녀자들은 외출할 때 쓰개치마를 써서 얼굴을 가렸습니다. 이 쓰개치마를 기름종이로 만들어 비옷으로 사용하기도 했죠. 1911년 배화 학당에서는 쓰개치마를 교칙으로 금지합니다. 당시 이 교칙은 자퇴하는 학생이 생길 정도로 파격적이었죠. 그러자 배화 학당은 학생들에게 검은색 우산을 주어 얼굴을 가리게 했어요.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우산은 다른 여성들 사이에서도 크게 유행합니다. 이 검은색 우산은 펼쳐진 모양이 마치 박쥐처럼 생겼다고 해서 박쥐우산 또는 편복산이라고 불렸죠.
1970년대 비닐 우산과 지우산의 끔찍한 혼종 ⓒ 조선일보
조선 말기에는 지우산이 등장합니다. 지우산은 대나무 우산살에 종이를 붙여 만든 우산으로 중국에서부터 전해진 것이었죠. 지우산은 1950~60년대까지만 해도 우리나라에서 흔히 보였습니다. 하지만 1970년대부터 비닐우산이 대량으로 생산되기 시작하면서 대부분 사라졌죠. 국내에는 윤규상 명인 홀로 지우산의 명맥을 이어 나가고 있습니다.
현대적 우산이 우리나라에 들어온 시기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아마 선교사를 통해 우산이 보급되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어요. 하지만 앞서 이야기한 이유로 초기에는 우산에 대한 반감이 컸죠. 당시의 시대상을 보여 주는 매체 〈독립신문〉에서는 우산을 쓰고 거리에 나간 사람이 집단 폭행을 당했다는 기사를 찾을 수 있습니다.

Fig.7 그 외 우산에 관한 TMI

스즈키 하루노부의 점프하는 젊은 여성
우산이 없어 곤란한 여성을 도와주어 사랑이 싹트기 시작했다는 클리셰는 이미 빅토리아 시대 잡지에 자주 등장하는 소재였어요.
1760년대 일본에서는 우산을 들고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는 여성을 그린 그림이 여럿 등장하는데, 이는 당시 우산을 들고 높은 곳에서 뛰어내린 뒤 무사히 착지하면 행복이 보장된다는 미신이 있었기 때문이죠.

Insight.

우산의 역사에서 가장 흥미로운 지점은 18세기 프랑스와 영국의 상반된 반응인 것 같습니다. 사실 정확하게 말하면 우산에 우호적인 프랑스의 반응이죠. 대체로 우산은 하늘의 뜻을 거스르는 물건이라고 생각되어 처음 도입될 때는 수많은 반발과 마주합니다.
프랑스에서 우산이 긍정적인 이미지로 도입될 수 있었던 것은 루이 14세가 우산의 격렬한 우호자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당시 왕은 트렌드 리더이기도 했으니까요. 몇 년 전만 해도 한겨울이 되면 온라인에 ‘지드래곤이 군밤 장수 모자 쓰고 나와 줬으면 좋겠다’ 하는 글이 올라오곤 했습니다. 다수의 사람들이 특정한 사람을 한 분야의 리더라고 판단하면 그 영향력이 정말 크다는 생각이 드네요.
그리고 루이14세의 영향권인 프랑스에서만 우산이 유행한 것을 보아 딱 그 사람의 영향력의 크기만큼만 유행이 만들어지는 것 같습니다.

Reference.

조드 드잔. (2006). 스타일 나다. 지안출판사
류희경. (1980). 한국복식사연구. 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Fox umbrellas [Website] (2021.11.21) URL : https://www.foxumbrellas.com/content/9-fox-umbrellas-ltd
German Patent office and Trademark Office [Website] (2021.11.21) URL : https://www.dpma.de/english/our_office/publications/milestones/90yearsknirps/index.html#:~:text=We owe this idea to,to distribute the innovative product.
*위의 책 링크로 구매가 이루어지면 저에게 소정의 수수료가 지급됩니다. 응원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