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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필의 역사

연필 필기도구의 하나. 흑연과 점토의 혼합물을 구워 만든 가느다란 심을 속에 넣고, 겉은 나무로 둘러싸서 만든다 - 국립국어원
연필이 언제 만들어졌을까요? 놀랍게도 최초의 연필이 만들어진 건 400여 년, 현대적인 연필은 그로부터도 약 200년이 지난 뒤에야 만들어지죠. 흑연만 있으면 될 것 같은데 연필은 왜 이렇게 늦게 만들어졌을까요?

고품질 흑연의 발견 

사실 흑연은 기원전 이집트 유물에서도 발견되었을 만큼 오래된 물질이에요. 하지만 그때 사용되던 흑연은 필기구로 적합하지 않았고, 연필에 쓰이기 좋은 흑연은 영국의 보로데일 지방에서 16세기가 되어서야 발견되죠. 고품질의 흑연이 발견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1610년, 런던 거리에서 흑연을 파는 것은 이미 일상적인 일이었습니다. 보통은 종이나 줄로 감아 쓰거나 밀짚에 끼우거나, 흑연을 나무로 만든 연필 케이스에 넣어 사용하였습니다.
흑연 사용이 점차 일반화되자 컴벌랜드 광산에서 채굴되는 질 좋은 흑연을 훔쳐 팔면 큰돈을 벌 수 있다는 소문이 퍼졌습니다. 이런 불법적인 반출을 막기 위해 광부들은 광산 밖으로 나올 때면 몸수색을 받아야했죠. 영국은 흑연을 보호하기 위해 원하는 양만큼 채굴하고 나면 보로데일 광구를 몇 년간 폐쇄하곤 했는데, 갱구를 물로 채워놓기도 했어요. 그래서 5~6년에 한 번씩, 그것도 약 6주 정도만 한동안 필요한 양을 집중적으로 채광했다고 하죠. 심지어 1752년에는 관련 법인 '흑연광 도굴 및 절도의 효과적 방지를 위한 법률'이 제정되기도 했어요.
당시 엘리자베스 여왕은 흑연 개발을 위해 독일인 기술자들을 고용했다고 하는데요. 독일로 돌아온 이들은 유럽 대륙산 흑연으로 연필을 만들기 시작했다고 추측하고 있어요. 하지만 고품질인 영국산 흑연과는 달리 유렵 대륙산 흑연은 불순물이 너무 많아 그대로 쓰면 종이가 긁히거나 찢어졌어요. 그래서 불순물을 제거하고, 여러 재료를 혼합했는데요. 이렇게 가공한 흑연도 보로데일 흑연 품질보다 한참 떨어졌다고 합니다.

콩테, 콩테를 만들다 

이 문제점은 18세기 말 프랑스 혁명 전쟁에서 해결이 되는데요. 유럽의 국가들과 전쟁을 벌인 프랑스는 적국인 영국과 독일의 연필을 구할 수 없어졌고, 프랑스 전쟁 장관은 니콜라 자크 콩테에게 연필 개발을 지시해요. 당시 연필은 중요한 전쟁 물자였는데, 전투 속에서 깃털에 잉크를 묻혀 쓰는 것는 것보다 훨씬 효율적이었기 때문이죠.
당시 콩테는 풍선 기구를 군사 작전용으로 이용하는 연구를 하고 있었는데, 이때 폭발 사고로 왼쪽 눈에 상처를 입어서 그림을 보면 한쪽에 안대를 차고 있죠. 아무튼, 1794년 콩테는 연필 개발에 성공하고 특허도 내요.
콩테의 새로운 연필심 제조 공법은 다음과 같아요.
불순물을 제거한 고운 흑연 분말을 점토와 섞어 물로 반죽한다.
이 반죽을 직사각형 틀에 꾹꾹 눌러 넣는다.
흑연 반죽이 완전히 마르면 틀에서 꺼낸 다음, 고온에 굽는다.
이 같은 공법으로 만들어진 연필은 지금도 쓰이는 '콩테 크레용'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콩테가 개발한 연필심은 독일 것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필기질이 좋아 거의 영국산 연필에 버금갈 정도였습니다. 무엇보다 프랑스산 연필은 흑연과 점토의 혼합 비율을 달리함으로써 딱딱한 정도를 다양하게 생산할 수 있었고, 다 쓸 때까지 균질하게 유지되었는데요, 이는 영국산 연필에도 없는 큰 장점이었습니다.

최초의 연필 장인 스테들러 

ⓒStaedtler
독일에는 연필 하면 지금도 유명한 두 회사가 있죠. 스테들러와 파버 카스텔. 먼저 이야기해볼 것은 스테들러인데, 창립자 프레드리히 슈테들러는 장인에게서 목공 기술을 전수받아요. 그리고 당시 돈이 되는 연필 제작에 관심을 가지게 되죠. 당시 연필 제작은 흑연과 목재를 다루는 장인을 따로 두었는데요. 이 공정을 하나로 전문화하여 생산하지 못하다가, 스테들러의 꾸준한 요청으로 1706년이 되어서야 연필 장인으로 인정받게 되죠.

저 세상 복지, 파버 카스텔 

한편, 카스파어 파버라는 장인은 1760년 뉘른베르크의 옆 동네 슈타인에 정착했습니다. 처음에 파버는 집에서 연필을 만들었어요. 이렇게 1주일 동안 만든 연필을 인근 도시에 내다 팔았는데, 양이 너무 적어서 손바구니 담아서 들고 다닐 정도였다고 해요. 카스파어 파버가 죽고 나서 아들이 가업을 물려받고 나서는 사업이 확장되었다고 하죠.
파버사가 엄청난 경쟁력을 갖추게 된 계기는 새로운 흑연 광산의 발견때문이에요. 1846년 장 피에르 알리베르는 금맥을 찾으려고 시베리아 동부를 뒤지고 있었어요. 그런데 금은 못 찾고 흑연을 발견하게 되죠. 이 흑연이 보로데일 지방의 흑연과 필적할 만큼의 고품질이었기 때문에 러시아 왕실과 프랑스 황제로부터 훈장을 받았으며, 흑연이 발견된 산의 이름이 이 사람의 이름을 따서 알리베르산으로 개명돼요.
장 피에르 알리베르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당시 가장 큰 연필회사였던 파버 사에게 흑연 독점 구입권을 팔아요. 1856년 계약이 체결되고 1861년 파버사는 시베리아산 흑연으로 만든 연필을 시장에 내놓게 돼요. 5년 동안을 흑연 개발에 매진한 거죠. 이 개발 방식은 기업 비밀이었는데, 이 때문에 파버사는 직원들의 이직을 막기 위해 애를 써요. 지금 봐도 상당히 파격적인 복지혜택을 주었는데, 연금, 주거지원, 육아지원, 임직원 전용 대출 및 학교, 병원, 도서관, 야외정원, 실외 체육관 등 편의 시설 제공 등을 제공했다고 해요.

최초의 연필 회사 타이틀은 누구에게? 

비슷한 시기에 창립된 두 회사는 오랜 기간 어디가 더 먼저 연필을 제작했는지에 대한 법정 공방을 벌였는데요. 스테들러가 훨씬 먼저 연필을 제작했지만, 법적으로는 파버카스텔이 더 오래된 회사로 등록되어 있어요. 스테들러는 뉘른베르크 길드의 규정에 묶여 1835년에야 공식적으로 회사를 등록하였고, 파버는 슈타인에서 사업을 시작했기 때문이죠. 결국 이 법정 공방은 두 회사의 창립 200년을 훌쩍 넘긴 1990년이 되어서야 법정이 파버카스텔의 손을 들어주며 끝나게 됩니다.
<참고문헌>
헨리 페트로스키, 연필, 서해문집, 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