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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 약주, 정종의 차이를 아시나요?

청주 찹쌀을 쪄서 지에밥과 누룩을 버무려 빚어서 담갔다가 용수를 박아서 떠낸 술.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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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걸리, 소주를 이전에 다룬 적이 있었는데요. 문득 청주만 다루면 우리나라 술은 다 다루는구나 싶어서 이번 주제는 청주의 역사로 정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소소하게나마 시리즈 아닌 시리즈를 완결시키니 마음이 편하네요.

Fig.1 청주는 막걸리와 한 몸

막걸리의 역사에서도 살펴본 것처럼, 술은 곡물이 자연스럽게 발효되면서 탄생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술이 익는 과정을 살펴보면 탁한 부분은 가라앉고 맑은 부분은 위로 뜨게 되는데요. 이 중 맑은 부분만 떠내면 청주가 되고, 청주를 떠내고 남은 술지게미에 물을 타서 다시 한번 걸러낸 것이 막걸리죠. 따라서 막걸리와 청주의 기원은 궤를 함께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고려시대 이규보가 남긴 문헌에 따르면 막걸리는 신분 낮은 사람들이 주로 마시고, 신분이 높은 사람들은 주로 맑은 술 청주를 마셨다고 하죠.

Fig.2 메인스트림은 청주

Figure.1 신윤복의 <주사거배>
고려 시대에는 술을 주로 사찰에서 빚었습니다. 겨울철에 좌선을 행할 때 몸을 덥히기 위해, 찾아오는 손님을 대접하기 위해 곡차라는 이름으로 술을 담갔죠. 게다가 당시에는 사원이 중국의 사신이 묵어가는 숙소의 역할도 했기에 술이 필요하기도 했고요.
조선으로 넘어오면서 사대부 집안에서는 제사 때 필요한 술을 직접 빚곤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상류층 중심의 고급스러운 술 문화가 발달하게 되는데요.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멥쌀에서 찹쌀로의 변화와 여러 번 덧술하는 중양주의 발전이었습니다.
찹쌀은 멥쌀보다 귀한 쌀이었고, 찹쌀로 술을 빚으면 더 진한 단맛과 진득한 바디감을 낼 수 있었는데요. 단맛을 내기 어려운 과거에는 단맛 자체가 고급스러움의 상징이었죠.
중양주는 덧술한 횟수에 따라 이양주, 삼양주, 사양주, 오양주 등으로 나뉘는데요. 오양주로 갈수록 도수도 높고 향도 더 풍부해지죠. 심지어는 술에 넣지도 않은 꽃이나 과일의 향이 났다고 하는데요. 이를 아름다울 방자를 써서 방향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이처럼 집집마다 사치스러운 술을 빚으며 다양한 술이 등장하는데요. 하지만 일제강점기가 되면서 위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일제강점기가 되면 일본은 세금을 거두기 위해 1916년에 주세령을 공표합니다. 세금을 효율적으로 걷을 수 있도록 제조장을 집약시키고, 조선의 술을 없애는 주류의 개량을 추진하죠. 이로인해 많은 조선의 술들이 사라지게 됩니다.
*이 부분은 막걸리에서도 동일하게 다루었던 내용인데요. 기억하지 못하실 수도 있고 그사이에 새로 구독해 주신 구독자분들도 있으니까요. 그대로 적어보았습니다:)

Fig.3 약주는 약으로 쓰는 술?

Figure.2 금주령을 내려놓고 본인도 약주를 마신 영조
오늘날 약주는 효소를 지닌 곰팡이를 곡류에 번식시킨 ‘누룩’을 이용해 빚은 청주를 의미합니다. 하지만 처음엔 말 그대로 약으로 사용하는 술을 의미했죠. 실제로 동의보감에는 갖가지 잎이나 열매, 줄기, 뿌리, 동물까지 사용한 약으로 쓰는 다양한 술이 등장하기도 하고요.
하지만 조선시대 약주의 의미가 넓어지는 계기가 생기는데요. 바로 영조 시기에 내려진 금주령이었습니다. 식량 문제로 금주령을 내렸지만, 제사상 혹은 결혼식에 올리는 술 그리고 병을 치료하기 위해 약으로 먹는 술은 예외로 했죠. 그러자 금주령 시기에도 술을 마시고자 했던 사람들이 자신이 마시는 술은 몸이 아파 마시는 약주라고 둘러대기 시작합니다. 그 상황이 이어져 약주는 청주의 별칭으로 굳어지게 되죠.

Fig.4 일본에 빼앗긴 청주

Figure.3 일제 강점기 당시 주막의 모습 ⓒ국립민속박물관
1910년 한일합병조약이 체결되고 일본은 본격적으로 조선은 수탈하려고 합니다. 수탈하기 가장 좋은 대상은 세금이었고, 술에 매기는 주세는 그중 큰 부분을 차지했죠. 주세를 효율적으로 징수하기 위해서 양조장의 대형화와 양조 공정의 효율화를 추진합니다. 조선총독부 입장에서는 생산력이 1인 생산자 100명한테 세금을 걷는 것보다 생산력이 100인 생산자 1명한테 세금을 걷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었고요. 또 그런 규모의 양조장을 운영할 수 있는 재력을 가진 사람은 대부분 일본인이었으니까요.
이 과정에서 조선의 술빚는 전통 방식인 누룩을 이용한 방식은 효율적이지 않았는데요. 누룩은 기후와 환경, 만듦새에 따라서 변했기 때문에 일정한 맛을 내야 하는 공장식 양조에는 적합하지 않았거든요. 따라서 조선총독부는 통제가 비교적 쉬운 일본의 방식인 입국을 이용한 세이슈セイシュ를 들여옵니다.
Figure.4 청주가 되어버린 사케
문제는 세이슈는 한자로 청주清酒 로 조선의 청주와 완전히 명칭이 겹치는 문제가 있었어요. 이에 따라 일제는 조선의 청주를 약주로 명명하며 구분하죠. 여기에는 기반 작업이 있었는데요. 조선총독부에서 주세법 제정하기 전, 일본인에 의해 쓰인 <조선주조사>에는 약주의 유래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어요.
‘서성이라는 사람의 청주가 맛이 좋기로 유명했는데, 그의 아호인 약봉과 그의 거주지인 약현에서 따와, 약봉이 만든 술, 약현에서 만들어진 술이란 뜻에서 약주라고 불렀다’
하지만 조선시대 쓰였던 <임원경제지>에는 이 술의 이름이 약주가 아닌 약산춘이라고 쓰여있죠. 이를 통해 일제가 의도적으로 청주를 약주로 바꾸기 위해 기록한 것이라는 주장이 있어요. 사실이야 어찌 되었든 조선 총독부는 <조선주조사>의 기록에 기반해 약산춘을 빚는 방식처럼 누룩을 1% 이상 사용하면 약주라고 분류했어요. 누룩 1% 미만으로는 제대로 술을 빚을 수 없기 때문에 사실상 모든 조선의 청주를 약주로 분류한 것이죠.
이처럼 주세령을 제정하면서 ‘청주’는 일본의 것을 가리키게 되었고, 일정한 규모의 자본이 없으면 시장에 들어올 수 없도록 해 조선인들의 접근을 막았죠. 1909년부터는 전국에 주조기술관을 파견해 일본식 청주의 제조 기술을 전국에 보급합니다.
주세령에서의 약주와 청주의 정의는 아직도 변하지 않았는데요. 그래서일까요. 1924년 전통 누룩 제조업자의 수는 28,206개 제조장에서 1932년에는 416개 제조업체, 2022년에는 3곳에 불과하죠.

Fig.5 정종이 청주 아닌가요?

Figure.5 정종의 원조, 사쿠라 마사무네 ⓒsakuramasamune.co.jp
조선총독부가 조선 청주를 약주라는 카테고리로 묶자, 청주의 빈자리에 일본식 청주, 세이슈가 자리 잡게 되는데요. 이때 진출한 세이슈 브랜드 중에 정종正宗 이 있었습니다.
일본의 청주 명산지로 손꼽히는 고베에서 1717년부터 술을 빚은 것으로 유명한 야마무라주조가 있었는데요. 이곳에서 생산한 술은 청주의 일본어 발음인 세이슈와 비슷한 정종正宗 이란 한자를 붙여 판매했고, 이를 사람들은 마사무네라고 읽었어요.
야마무라주조의 마사무네는 일본 전역에서 인기를 끌게 됩니다. 마사무네의 인기에 편승하기 위해 일본 전역에서는 마사무네라고 이름 붙여 술을 파는 곳이 많아졌죠. 이렇게 되자 야마무라는 다른 마사무네와 구분 짓기 위해 ‘사쿠라 마사무네'라는 이름으로 상표등록을 합니다.
그런 상황에서 일제강점기 우리나라에도 수많은 마사무네 술들이 진출합니다. ‘사쿠라 마사무네’ 뿐만 아니라 ‘기쿠 마사무네’, ‘미모토 마사무네’, ‘와카마즈 마사무네’, ‘마루와 마사무네’ 등이 국내에 들어오죠. 그 결과 마사무네를 우리식으로 읽은 정종이 마치 청주인 것처럼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진 것이죠.

Fig.6 사케의 아주 간략한 역사

반면 현대적인 일본 술은 역설적으로 백제 사람에 의해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나라시대(710~784년)에 백제에서 온 수수보리라는 사람이 누룩을 이용해서 술을 양조했다는 기록이 있거든요. 이전까지는 자연적으로 발효시키거나, 사람의 입을 통해 발효시키는 형태의 술밖에 없었죠.
이후 사케의 발전 과정은 우리나라의 청주와 비슷합니다. 헤이안 시대(794~1185년)에는 주로 승려들이 빚어 소우보우슈僧坊酒 라 불렀습니다. 카마쿠라 시대(1185~1333년)에는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교토를 중심으로 술이 상품으로서 유통되기 시작했죠. 교토에 무로마치 막후 시대가 열리면서 술 시장은 좀 더 본격적으로 발달하게 되는데요. 1425년 교토에만 342개 양조장이 있었다고 합니다. 주세도 이때부터 생겼죠.
메이지 시대에는 양조 기술도 과학적으로 접근하려고 했는데요. 쌀을 깎는 정미기의 발명, 제조 기간을 줄이기 위해 유산을 넣는 방식, 증류주의 경우 연속식 증류기를 도입 등이 이 시기에 이루어지죠. 메이지 시대는 우리나라의 일제 강점기와 겹치기 때문에 당시 일본에서 도입되었던 양조의 공장화, 과학화가 우리나라에서도 이루어진 것을 볼 수 있죠.

Insight.

일제강점기에 우리나라의 술은 도태되어야 할 것으로 규정되어 일본의 입맛에 맞게 개량되었는데요. 그중에서도 가장 많은 고초를 겪은 건 이름을 잃어버리고 현재까지도 되찾지 못한 청주인 것 같습니다.
청주, 그러니까 오늘날의 약주를 맛보면 많은 술에서 새콤달콤한 맛을 느낄 수 있는데요.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단맛은 귀한 맛이었지만, 단맛이 흔해져 오늘날에는 소주나 막걸리에 비해 인기가 없는 것 같습니다. 인기가 없으니, 명칭의 문제가 아직도 바뀌지 않는 것이 아닐까요?

Reference.

김승호. (2022). 응답하라 우리술. 깊은샘
사카구치 긴이치로. (2011). 일본의 술. 인문사
탁재형. (2022). 우리술 익스프레스. EBSBOOKS
배종우. (2019). 사케의 역사. 의학신문. URL : http://www.bosa.co.kr/news/articleView.html?idxno=2100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