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g.1 탐구 vs 검증 - 헤로도토스, 투키디데스
Figure.1 헤로도토스
Figure.2 투키디데스
역사적 유물을 의식적으로 조사하고 과거를 탐구한 최초의 인물 중 알려진 이는 기원전 6세기 바빌로니아의 왕 나보니두스Nabonidus입니다. 그는 오래된 에밥바르 신전을 발굴해 자신의 왕권이 오랜 전통을 잇고 있음을 보여주려 했죠. 이처럼 최초의 역사는 권위를 정당화하는 도구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나 약 한 세기 뒤, 그리스의 헤로도토스Herodotus는 역사를 전혀 다른 방식으로 바라보기 시작합니다. 그에게 역사(Historia)는 '조사하고 탐구한다'는 의미였는데요. 그는 직접 여러 지역을 여행하며 사람들의 증언을 수집했고, 그리스와 페르시아뿐 아니라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스키타이, 인도 등 다양한 지역의 문화와 풍습을 함께 기록했습니다. 『역사』는 단순한 전쟁사가 아니라 서로 다른 문명을 비교하며 전쟁의 원인을 탐구한 최초의 세계사적 역사서로 평가되죠. 당시에는 기록이 부족해 신화와 전설도 함께 담겼지만, 그는 다양한 전승 자체를 탐구의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또한 인간의 오만과 욕망이 역사를 반복시킨다고 보며, 과거를 기록하는 이유는 현재와 미래를 위한 교훈을 얻기 위해서라고 생각했습니다.
헤로도토스 이후 등장한 투키디데스Thucydides는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그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서 신화와 전설을 최대한 배제하고, 직접 경험했거나 신뢰할 수 있는 증언을 바탕으로 사건을 기록하려 했죠. 여러 증언을 비교해 사실을 검증하고 사건의 원인과 결과를 논리적으로 설명했으며, 전쟁과 정치, 권력과 인간의 선택을 분석하는 데 집중했습니다. 그의 역사 서술은 현대 역사학의 실증적 방법에 훨씬 가까웠죠.
이처럼 헤로도토스와 투키디데스는 서로 다른 전통을 남겼습니다. 헤로도토스는 다양한 문화와 세계를 탐구하며 역사를 하나의 이야기로 엮었고, 투키디데스는 사실 검증과 논리적 분석을 통해 사건을 설명하려 했죠. 하나는 탐구와 서사, 다른 하나는 검증과 분석의 전통이었습니다. 오늘날의 역사학 역시 사실을 충실히 검증하면서도 그 사실에 의미를 부여하고 하나의 서사로 엮어 과거를 이해한다는 점에서, 이 두 전통 위에서 발전해 왔습니다.
Fig.2 종합적인 역사 - 사마천
Figure.3 사마천
서양에서 헤로도토스와 투키디데스가 역사학의 출발점을 마련했다면, 동양에서는 기원전 2세기 사마천이 전혀 다른 방식으로 역사 서술의 체계를 완성합니다.
사마천司馬遷은 『사기』를 집필하며 역사 서술의 새로운 기준을 세웠는데요. 그는 국가의 역사 기록을 관리하는 태사령으로 일하며 방대한 황실 기록과 문헌을 활용할 수 있었고, 전국을 직접 답사하며 전설과 민담까지 수집했습니다. 하지만 흉노와의 전투에서 패배해 투항한 장수 이릉을 변호했다가 한 무제의 노여움을 사 궁형을 당하는 치욕을 겪죠. 그럼에도 죽음을 택하지 않고 『사기』를 완성하는 데 평생을 바쳤습니다.
『사기』의 가장 큰 혁신은 기전체紀傳體라는 새로운 역사 서술 체계를 만든 것이었습니다. 기전체는 황제의 역사를 기록한 『본기』, 연표인 『표』, 제도와 문화를 다룬 『서』, 제후와 권력가를 기록한 『세가』, 다양한 인물의 삶을 담은 『열전』으로 구성되는데요. 이전의 역사서가 시간순으로 사건을 나열하는 데 집중했다면, 사마천은 한 사건을 정치·경제·사회·문화와 다양한 인물의 관점에서 입체적으로 서술했습니다. 이러한 방식은 이후 2천 년 넘게 중국과 동아시아 정사의 표준이 되죠.
사마천은 역사란 단순히 왕과 전쟁을 기록하는 일이 아니라고 보았습니다. 『열전』에서는 황제뿐 아니라 상인, 의사, 자객, 광대, 청백리, 탐관오리 등 평범하거나 주변부에 있던 사람들까지 역사의 주인공으로 등장시켰죠. 또한 경제, 화폐, 조세, 천문, 음악과 같은 제도와 문화까지 함께 다루며 사회 전체의 구조와 변화를 이해하려 했습니다. 그는 공자의 '춘추필법'처럼 도덕적 판단에 따라 사실을 수정하는 방식을 비판하고, 역사는 무엇보다 사실을 정확하게 기록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하지만 『사기』에도 한계는 있었습니다. 사마천은 한나라 관료의 입장에서 역사를 바라보았기 때문에 「조선열전」을 비롯한 주변 국가와 민족에 대한 기록은 중국 중심적이고 정보도 제한적이었죠. 또한 당시의 지리적·정보적 한계 때문에 역사의 공간 역시 중국을 크게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Fig.3 순환에서 직선으로 - 기독교의 역사관
Figure.4 아우구스티누스
헤로도토스는 인간의 오만과 욕망이 국가의 흥망을 반복시킨다고 보며 역사를 순환하는 과정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등장은 이러한 역사관을 크게 바꿔놓는데요. 기독교는 역사를 창조에서 시작해 최후의 심판으로 끝나는 하나의 직선적인 과정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역사는 더 이상 반복되는 사건들의 기록이 아니라, 신의 구원 계획이 실현되는 과정으로 이해되기 시작하죠.
이러한 역사관은 초기 기독교 역사가들에게 큰 영향을 줍니다. 에우세비우스Eusebius,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오로시우스Orosius 등은 교회의 역사를 인류 전체의 구원 역사 속에 위치시키며, 기독교가 가장 오래되고 정당한 신앙임을 설명하려 했습니다. 이들에게 역사 서술은 과거를 기록하는 작업인 동시에 신앙을 옹호하고 신의 섭리를 드러내는 중요한 수단이었죠.
역사가 신앙을 설명하는 역할을 맡게 되면서 역사 서술의 형식도 더욱 체계화됩니다. 로마 시대에 발전한 수사학의 전통을 이어받은 살루스티우스Sallustius와 키케로Cicero는 역사가는 사실을 공정하게 기록하고, 사건을 연대기적으로 배열하며, 원인과 결과를 논리적으로 설명하고, 읽기 쉬운 문체로 서술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이러한 원칙은 기독교 역사학에도 계승되어 이후 서양 역사 서술의 중요한 전통으로 자리 잡죠.
이처럼 기독교의 등장은 서양 역사학의 시간관과 역사의 목적을 모두 바꾸어 놓았습니다. 역사는 인간 사회의 반복을 관찰하는 학문에서, 신의 계획과 인류의 구원을 이해하는 학문으로 변화하는데요. 이러한 역사관은 이후 천 년 가까이 이어지며 중세 역사학의 기초가 됩니다.
Fig.4 목적을 위한 역사 - 중세의 역사
Figure.5 윌리엄 오브 말즈베리
중세 역사학에서 중요한 것은 객관적인 사실을 모두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가 수행해야 할 목적에 맞게 사건을 서술하는 것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참회왕 에드워드의 생애』는 왕비와 왕가를 칭송하기 위해 쓰인 책으로, 1066년 노르만족의 잉글랜드 정복처럼 불리한 사건은 아예 언급하지 않았는데요. 오늘날에는 편향된 역사처럼 보이지만, 당시에는 후원자를 기리고 도덕적 교훈을 전하는 것이 역사의 중요한 역할이었습니다.
역사가들은 고전 작가들의 문체와 수사학을 적극적으로 모방했습니다. 사실을 전달하는 것뿐 아니라 아름답고 설득력 있는 글을 쓰는 것이 좋은 역사라고 여겨졌기 때문이죠. 따라서 중세의 역사서는 오늘날처럼 객관적인 기록이라기보다 교훈과 권위를 전달하는 글에 가까운 성격을 지녔습니다.
그러나 12세기에 들어 변화가 나타납니다. 맘즈베리의 윌리엄William of Malmesbury은 여러 사료를 직접 수집하고 비교하며 의심스러운 기록은 배제하려 했는데요. 이는 현대 역사학의 사료 비판과 닮은 태도였습니다. 물론 그는 여전히 신의 섭리와 인간의 도덕성을 역사의 중요한 원인으로 이해했지만, 전해지는 이야기를 그대로 믿지 않고 검토하려 했다는 점에서 중세 역사학의 중요한 전환점으로 평가받죠.
이후 13세기에는 국사와 세계사뿐 아니라 기사도 이야기, 도시의 역사 등 다양한 형태의 역사서가 등장합니다. 여전히 후원자를 칭송하거나 교훈을 전달하려는 목적은 유지되었지만, 역사의 주제와 형식은 한층 다양해졌죠. 중세 말에 이르러 역사학은 여전히 신앙과 수사학의 영향을 받았지만, 한편으로는 사료를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방법도 조금씩 발전시키며 근대 역사학으로 나아갈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Fig.5 최초의 인류사를 쓰다 - 이븐 할둔
Figure.6 이븐 할둔
14세기 이븐 할둔Ibn Khaldun은 역사를 단순히 사건을 기록하는 작업이 아니라, 인간 사회를 움직이는 법칙을 탐구하는 학문으로 보았습니다. 그는 방대한 역사서 『성찰의 책』의 서론인 『역사서설(무깟디마)』에서 문명의 발생과 성장, 국가의 흥망을 설명하는 이론을 제시하며 역사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죠.
이븐 할둔은 역사 기록을 무조건 믿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역사가는 전해지는 이야기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여러 사료를 비교하고 당시의 사회와 정치, 경제, 인간의 본성을 함께 고려해 사실 여부를 검증해야 한다고 보았는데요. 실제로 그는 성경에 등장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규모처럼 당시 널리 알려진 기록도 현실적으로 가능한지 계산하고 비교하며 비판적으로 검토했습니다. 이러한 태도는 근대 역사학보다 수백 년 앞선 사료 비판의 시도였죠.
그는 또한 문명을 자연환경과 인간 사회의 상호작용 속에서 이해하려 했습니다. 세계를 여러 기후대로 나누어 환경이 문명의 발전에 영향을 준다고 설명했으며, 도시와 유목 사회를 비교해 국가가 어떻게 성장하고 쇠퇴하는지 분석했죠. 특히 왕조의 흥망을 설명하는 핵심 개념으로 아싸비야Asabiyyah를 제시했는데요. 아싸비야는 혈연과 공동체를 바탕으로 형성되는 연대 의식과 결속력을 뜻합니다. 강한 아싸비야를 가진 유목 집단은 국가를 세우지만, 시간이 지나 부와 권력을 누리며 결속력이 약해지면 새로운 집단에게 자리를 내주고 결국 왕조는 몰락한다고 보았습니다.
하지만 그의 이론에도 한계는 있었습니다. 왕조의 흥망을 하나의 보편적 역사 법칙으로 설명하려 했지만, 이는 당시 북아프리카와 이슬람 세계의 경험을 일반화한 측면이 강했죠. 또한 종교와 정치가 결합된 사회에서 활동했던 그는 시대적 제약을 벗어나기 어려웠으며, 책 곳곳에 종교적 찬양과 신앙 고백을 담아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이븐 할둔은 역사학사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합니다. 그는 환경, 경제, 사회 구조, 인간의 심리를 함께 고려해 문명의 흥망을 설명하려 했으며, 역사를 과학적으로 이해하려는 최초의 시도를 보여주었죠. 그의 사상은 훗날 토인비의 문명사와 현대의 빅히스토리까지 이어지며, 오늘날에는 '역사사회학의 아버지'이자 '최초의 과학적 역사학자'로 평가받습니다.
Fig.6 과거를 다시 읽다 - 르네상스
Figure.7 로렌초 발라
르네상스 시대에는 고대 그리스와 로마 문화가 재평가되면서 과거로부터 정치적·도덕적 교훈을 얻으려는 생각이 다시 강조됩니다. 역사는 정치가와 통치자를 위한 선례의 창고로 여겨졌고, 키케로식 수사학도 다시 중요해졌죠.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도시마다 자신들의 기원을 고대와 연결하려는 역사서가 활발히 쓰였습니다.
르네상스 시대 사람들은 자신들이 고대의 정통 계승자라고 믿었는데요. 역사가들은 피렌체가 고대 로마의 직계 후손이며 이탈리아 시민들이 고전적 사유의 진정한 계승자임을 보여주려 했습니다. 이러한 인식은 역사의 시대 구분에도 영향을 미쳤죠. 더 이상 인류를 성서의 일곱 시대로 나누지 않고 고대·중세·근대라는 세 시대로 이해하기 시작했는데요. 이 과정에서 중세는 고대의 영광과 자신들의 현대 사이에 놓인 열등한 '암흑시대'로 규정됩니다.
하지만 르네상스가 역사서술에 남긴 영향은 수사학의 부활만이 아니었습니다. 고대 문헌으로 돌아가 원문을 읽고 비교하려는 인문주의의 태도는 문헌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방법도 발전시켰는데요. 대표적인 인물이 로렌초 발라Lorenzo Valla입니다. 그는 교황권의 중요한 근거로 여겨지던 「콘스탄티누스의 기증장」을 분석해 이 문서가 고대 로마 시대의 문서가 아니라 후대에 만들어진 위조문서임을 밝혀내는데요. 그의 근거는 문서에 쓰인 라틴어였습니다. 발라는 그 문체와 표현이 4세기의 고전 라틴어와 맞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했죠.
이 사건으로 문헌 자체의 언어와 형식, 표현을 분석하면 그 문서가 언제, 어떤 맥락에서 만들어졌는지 판단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 과거는 단지 전해지는 이야기를 받아들이는 대상이 아니라, 남겨진 증거를 통해 비판적으로 검토해야 할 대상이 되기 시작했죠. 르네상스 인문주의는 한편으로 역사를 아름답고 교훈적인 글쓰기로 만들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현대 역사학의 핵심 방법인 문헌비판의 길을 열었습니다.
Fig.7 진실은 어떻게 증명할까? - 16~17세기 역사
Figure.8 장 보댕
16세기 종교개혁 이후 가톨릭과 개신교는 자신들의 신앙이 역사적으로 정통이라는 점을 입증하기 위해 과거의 문헌과 기록을 적극적으로 활용했습니다. 역사는 종교 논쟁의 핵심 무기가 되었고, 이를 뒷받침할 사료를 수집하고 검토하는 작업도 활발해졌죠.
이 과정에서 역사는 새로운 위기를 맞기도 했습니다. 역사가 사실보다 특정한 목적을 전달하는 데 치중한다면, 그것은 문학과 무엇이 다른가라는 의문이 제기된 것인데요. 이러한 문제의식 속에서 장 보댕Jean Bodin은 『역사를 쉽게 이해하는 방법』에서 역사 연구의 가치와 방법을 체계적으로 정리합니다. 그는 역사가들의 목적과 편향을 비판적으로 검토해야 하며, 역사는 진실을 탐구하는 학문이어야 한다고 주장했죠. 보댕이 추구한 '진실'은 오늘날의 과학적 진실이라기보다 후기 르네상스 시대의 학문을 통해 신의 계획을 읽어내는 것에 가까웠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역사가 다시 '진실한 이야기'를 추구해야 한다는 문제를 역사학의 중심으로 되돌려 놓았죠.
종교적 논쟁은 역설적으로 역사학의 방법론을 크게 발전시켰습니다. 가톨릭과 개신교 학자들은 자신들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방대한 문헌을 수집하고 서로 비교하며 진위를 검증했는데요. 또한 골동품 연구자들은 문헌뿐 아니라 동전, 비문, 유물 같은 다양한 증거를 함께 연구하며 역사 연구의 범위를 넓혀 갔습니다.
이처럼 16~17세기 역사학은 편향된 논쟁 속에서 발전했습니다. 역사는 종교적 목적에 이용되기도 했지만, 바로 그 과정에서 사료를 수집하고 비교하며 검증하는 방법이 크게 발전했죠. 이후 역사학은 단순히 글을 쓰는 작업을 넘어 증거를 바탕으로 과거를 탐구하는 학문으로 변화하기 시작합니다.
Fig.8 사건에서 사회로 - 18세기 역사
Figure.9 에드워드 기번
18세기 계몽주의 시대에는 역사가 철학과 결합하기 시작합니다. 볼테르Voltaire, 데이비드 흄David Hume, 잠바티스타 비코Giambattista Vico 등은 단순히 정치적 사건을 기록하는 것을 넘어 인간과 사회가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설명하려 했는데요. 이들은 정치뿐 아니라 지리, 기후, 경제, 사회 구조, 문화 등 다양한 요소가 역사를 만든다고 보았으며, 역사학의 관심도 점차 넓어졌습니다.
이 시기에는 과거를 바라보는 시간관도 크게 달라졌습니다. 지질학과 식물학의 발전으로 세계의 역사가 성서가 설명하는 것보다 훨씬 오래되었다는 인식이 확산되었고, 역사가들은 신의 섭리 대신 우연, 위인의 역할, 인간 본성 등 다양한 방식으로 역사의 원인을 설명하려 했죠. 데이비드 흄은 역사를 통해 시대와 장소를 초월하는 인간 본성의 보편성을 발견할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흐름을 집대성한 인물이 에드워드 기번Edward Gibbon이었는데요. 그는 『로마제국 쇠망사』에서 방대한 사료 분석과 철학적 해석을 결합해 로마 제국의 쇠퇴를 설명하려 했습니다. 비록 오늘날 그의 해석이 모두 받아들여지는 것은 아니지만, 역사적 증거를 바탕으로 복잡한 사회적·문화적 요인을 함께 분석하려 했다는 점에서 현대 역사학의 중요한 전환점을 마련했죠.
18세기 후반 이후 역사가들은 정치사만으로는 역사를 설명할 수 없다고 보았습니다. 사회, 경제, 문화, 기술, 지리 등 다양한 요소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역사를 만든다는 인식이 확산되었고, 역사학은 정치사의 기록에서 벗어나 인간 사회 전체를 설명하려는 학문으로 변화합니다.
Fig.9 사실만을 말해라 - 랑케
Figure.10 레오폴드 폰 랑케
18세기의 역사 저술가들은 역사를 통해 인류와 인간 존재에 관한 철학적 질문을 던지거나, 아름다운 문체로 과거를 서술하는 데 관심이 많았습니다. 계몽주의 시대의 영향 속에서 그들은 과거를 평가하고 현재를 계몽하려 했죠.
반면 19세기 독일의 역사가 레오폴트 폰 랑케Leopold von Ranke는 역사를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학문으로 만들고자 했습니다. 그는 상상이나 철학적 해석을 배제하고 문헌을 면밀히 분석해 "그것이 실제로 어떠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 역사학의 목표라고 주장했죠.
투키디데스나 이븐 할둔도 사실 검증을 중시했지만, 랑케는 유럽 각국의 문서보관소를 직접 찾아다니며 원자료를 비교·분석하는 방식을 체계화합니다. 군주제를 옹호했던 랑케는 유럽 각국의 왕과 귀족들의 신뢰를 얻었고, 일반 연구자들이 접근하기 어려웠던 국가 문서보관소를 자유롭게 이용하는 특권을 누렸는데요. 이렇게 수집한 사료를 바탕으로 세미나를 운영해 근대 역사학의 연구 방법을 정립했습니다.
하지만 랑케가 말한 객관성에는 한계도 있었습니다. 그는 정치사와 통치자를 중심으로 역사를 바라봤고 군주제를 옹호했으며, 유럽 중심주의와 당대의 편견에서도 자유롭지 못했죠. 또한 역사를 '있는 그대로' 재현할 수 있다는 그의 주장은 오늘날에는 실현 불가능한 이상으로 평가됩니다. 역사가는 과거의 모든 사실을 알 수 없으며, 어떤 사실을 선택하고 의미를 부여할지는 결국 역사학자의 관점과 문제의식에 영향을 받기 때문이죠.
또한 그는 인간의 물질문명은 발전하지만 도덕과 정신은 진보하지 않는다고 보며 군주제의 정당성을 옹호했습니다. 그러나 실제 역사는 국민주권과 공화제를 중심으로 전개되었고, 대부분의 군주제는 20세기에 들어 몰락했죠. 결국 랑케는 과거 연구에는 뛰어났지만 현재와 미래의 흐름을 읽는 데에는 한계를 드러냈습니다.
그럼에도 랑케의 영향력은 매우 컸습니다. 그는 철저한 사료 검증과 실증 연구를 역사학의 기본 원칙으로 확립해 현대 역사학의 토대를 마련했는데요. 반면 역사 서술을 문헌의 단순한 정리에 머무르게 만들고, 역사 속 인간의 삶과 의미를 충분히 담아내지 못했다는 비판도 받습니다. 니체는 이런 역사가 삶을 풍요롭게 하기보다 과거의 사실만 축적하는 '골동품 같은 역사'가 될 수 있다고 비판했죠.
Fig.10 역사의 주인공을 바꾸다 - 미슐레, 마르크스, 홉스봄
Figure.11 줄 미슐레
1789년 프랑스 혁명 이후 역사가들은 왕과 귀족이 아니라 국민이 역사를 만든다는 새로운 관점을 갖기 시작합니다. 이러한 흐름을 대표하는 인물이 프랑스의 역사가 쥘 미슐레Jules Michelet였는데요. 그는 『프랑스사』를 통해 프랑스 혁명을 군주가 아닌 국민이 만들어낸 사건으로 해석하며 역사의 주인공을 왕에서 국민으로 옮겨 놓았습니다.
Figure.12 카를 마르크스
이러한 변화는 카를 마르크스Karl Marx에게 이어집니다. 마르크스는 노예와 농민, 노동자 같은 피지배계급을 역사의 중심에 놓았죠. 그는 사회를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이 대립하는 구조로 보았으며, 지금까지 존재한 사회의 역사는 곧 계급투쟁의 역사라고 주장했습니다.
마르크스는 역사가 우연한 사건의 연속이 아니라 일정한 법칙에 따라 변화한다고 생각했는데요. 그는 물질적 생산 활동이 인간의 의식과 정치, 법률, 문화를 결정한다는 유물론과, 사회가 내부의 모순과 대립을 통해 변화한다는 변증법을 결합해 유물사관을 제시했습니다. 생산력이 발전하면 기존 생산관계와 충돌하고, 그 충돌이 계급투쟁과 사회혁명으로 이어져 새로운 사회가 등장한다는 것이죠. 이러한 관점에서 그는 인류의 역사가 원시공산제에서 노예제, 봉건제, 자본주의를 거쳐 공산주의 사회로 발전한다고 보았습니다.
마르크스의 역사관은 왕과 영웅 중심의 역사에서 벗어나 노동자와 농민의 삶, 경제 구조와 계급 관계를 역사 연구의 대상으로 확장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후 사회사와 노동사, 경제사뿐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다루는 여러 역사 연구에도 큰 영향을 주었죠.
하지만 모든 사회가 동일한 단계를 거쳐 발전한다는 단선적 역사관에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계급투쟁을 역사의 원동력으로 보면서도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계급이 사라진다고 설명한 점 역시 논리적 모순으로 지적되었죠. 또한 스탈린 시대에는 유물사관이 절대적인 역사법칙으로 교조화되면서, 역사적 사실을 통해 이론을 검증하기보다 이미 정해진 이론에 맞는 사실을 골라내는 역사 서술이 나타나기도 했습니다.
Figure.13 에릭 홉스봄
그럼에도 마르크스가 제시한 문제의식은 20세기 역사학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특히 에릭 홉스봄Eric Hobsbawm은 마르크스의 역사관을 바탕으로 사회와 노동, 혁명과 자본주의의 발전을 연구하며 이를 실제 역사 연구로 발전시켰죠.
그는 역사를 왕과 영웅의 이야기가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과 사회 구조의 변화 속에서 이해하려 했습니다. 대표작인 『혁명의 시대』, 『자본의 시대』, 『제국의 시대』, 『극단의 시대』에서는 1789년 프랑스 혁명부터 20세기 말까지를 하나의 흐름으로 설명했는데요. 특히 '장기 19세기(1789~1914)'와 '짧은 20세기(1914~1991)'라는 개념을 제시해 역사의 시간 구분 자체를 새롭게 해석했으며, 『발명된 전통』에서는 오랜 전통처럼 보이는 많은 국가 의례와 관습이 실제로는 근대 국가가 만들어낸 것임을 보여주었습니다.
홉스봄은 마르크스의 관점을 계승하면서도 역사적 사실을 이론에 억지로 맞추기보다 방대한 사료를 바탕으로 사회 변화를 분석했습니다. 이를 통해 사회사와 노동사, 문화사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으며, 마르크스의 역사관을 20세기 역사학으로 이어주는 대표적인 역사가로 평가받죠.
Fig.11 사건에서 구조, 다시 개인으로 - 아날학파, 미시사
Figure.14 페르낭 브로델
20세기 초까지 역사학은 여전히 국가와 전쟁, 정치 지도자를 중심으로 서술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에 프랑스의 역사가 마르크 블로크Marc Bloch와 뤼시앵 페브르Lucien Febvre는 1929년 『아날 경제·사회사』Annales d'histoire économique et sociale를 창간하며 새로운 역사학을 제안하는데요. 이들이 시작한 아날학파는 정치적 사건보다 사회와 경제, 지리와 기후, 종교와 일상생활처럼 오랜 시간에 걸쳐 지속되는 구조를 통해 역사를 이해하려 했습니다.
아날학파는 역사를 특정한 사건들의 연속이 아니라 다양한 요소가 오랜 시간에 걸쳐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과정으로 보았습니다. 이를 위해 역사학뿐 아니라 지리학, 경제학, 사회학, 인류학 등 여러 학문의 연구 방법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으며, 왕과 정치가뿐 아니라 농민과 상인, 여성, 평범한 사람들의 삶도 중요한 연구 대상으로 삼았죠. 역사학의 관심은 정치사에서 사회 전체로 크게 확장된 것입니다.
아날학파를 대표하는 인물은 페르낭 브로델Fernand Braudel인데요. 그는 『펠리페 2세 시대의 지중해와 지중해 세계』에서 전쟁이나 군주의 결정보다 지리, 기후, 교역망과 같은 장기적인 구조가 역사를 이해하는 데 더 중요하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역사가 서로 다른 속도로 흐른다고 보았으며, 수백 년 동안 거의 변하지 않는 환경과 사회 구조를 '장기지속'이라 불렀죠. 이 개념은 역사학이 개별 사건보다 사회의 구조와 장기적인 변화를 연구하는 학문으로 발전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하지만 아날학파 역시 모든 것을 구조로 설명하다 보니 개인의 선택과 우연, 정치적 사건의 중요성을 지나치게 축소한다는 비판도 받았는데요. 이에 20세기 후반에는 거대한 구조보다 평범한 개인의 삶을 통해 당시 사회를 이해하려는 미시사가 등장합니다. 대표적인 역사가 카를로 긴즈부르그Carlo Ginzburg는 『치즈와 구더기』에서 16세기 이탈리아의 한 방앗간 주인 메노키오의 삶을 분석해 당시 사람들의 종교관과 문화, 지식이 어떻게 형성되고 전파되었는지를 보여주었죠. 미시사는 작은 사건을 연구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한 개인의 삶을 통해 당시 사회 전체를 이해하려는 새로운 역사 연구 방법이었습니다. 이로써 역사학의 관심은 국가에서 사회로, 다시 사회에서 개인의 경험으로까지 확장되었죠.
Fig.12 객관적인 역사가 가능할까? - E.H. 카, 포스트모더니즘
Figure.15 E.H. 카 ⓒNational Portrait Gallery, London
랑케 이후 역사학은 사료를 철저히 검증해 과거를 객관적으로 복원할 수 있다는 믿음이 널리 퍼졌습니다. 그러나 19세기 말부터는 역사란 단순히 사실을 기록하는 학문이 아니라 인간을 이해하는 학문이라는 새로운 관점도 등장하는데요. 독일의 철학자 빌헬름 딜타이Wilhelm Dilthey는 자연과학은 자연을 설명하는 학문이지만, 역사학은 인간의 삶을 이해하는 학문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역사가는 단순히 사실을 수집하는 사람이 아니라, 당시 사람들의 생각과 시대적 맥락을 이해해야 한다고 보았죠.
이러한 흐름을 이어받은 영국의 역사철학자 로빈 조지 콜링우드R. G. Collingwood는 역사를 과거의 사실을 나열하는 작업이 아니라, 과거 사람들의 생각을 역사학자의 머릿속에서 다시 재현하는 과정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는 "모든 역사는 사상의 역사"라고 주장하며, 역사가는 과거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만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를 이해해야 한다고 설명했는데요. 따라서 역사 연구는 단순한 사실의 수집이 아니라 인간의 사고와 의도를 해석하는 작업이라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이처럼 역사를 인간을 이해하는 학문으로 보려는 흐름은 20세기에 들어 역사 서술 자체를 다시 돌아보게 만듭니다. E. H. 카Edward Hallett Carr는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과거에는 무수히 많은 사실이 존재하지만, 그 가운데 무엇을 역사적 사실로 선택하고 의미를 부여할지는 결국 역사가의 문제의식에 달려 있다고 보았죠. 그는 "역사란 역사가와 사실 사이의 상호작용이며,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말하며, 완전한 객관성보다 비판적 해석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즉, 역사적 사실 자체를 부정한 것이 아니라, 사실이 역사로 서술되는 과정에는 역사가의 선택과 해석이 필연적으로 개입한다고 본 것이죠.
미국의 역사철학자 헤이든 화이트Hayden White는 이러한 논의를 한 걸음 더 발전시켰습니다. 그는 역사서 역시 하나의 서사(narrative)라고 주장하며, 역사가는 사실을 단순히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사건을 선택하고 어떤 순서로 배열하며 어떤 방식으로 이야기하느냐에 따라 역사의 의미가 달라진다고 보았는데요. 다시 말해 역사도 문학처럼 서사 구조를 통해 의미를 구성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은 하나의 절대적으로 객관적인 역사만 존재한다는 생각에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또한 역사학이 왕과 정치 지도자 중심의 역사뿐 아니라 여성사, 노동사, 식민지 역사, 하위주체사처럼 기존 역사에서 충분히 주목받지 못했던 사람들과 집단의 경험을 새롭게 조명하는 데에도 영향을 주었죠. 역사학의 연구 대상은 점차 다양한 사회 구성원과 여러 관점으로 확장되었습니다.
Fig.13 문명의 역사 - 슈펭글러, 토인비
Figure.16 오스발트 슈펭글러
19세기까지 역사학은 민족과 국가, 왕조를 중심으로 역사를 연구했습니다. 하지만 20세기에 들어 일부 역사학자들은 개별 국가만으로는 인류 역사를 설명할 수 없다고 보았는데요. 그들은 국가보다 더 큰 단위인 문명을 중심으로 역사를 이해하려 했고, 이를 통해 문명의 탄생과 성장, 쇠퇴, 그리고 문명 간의 관계를 설명하는 새로운 역사관을 제시했습니다.
그 시작은 오스발트 슈펭글러Oswald Spengler였습니다. 그는 1918년 『서구의 몰락』을 통해 서구 문명 역시 다른 문명과 마찬가지로 탄생과 성장, 쇠퇴와 몰락을 거치는 하나의 생명체라고 주장했는데요. 또한 당시 유럽에서 보편적 역사로 받아들여졌던 '고대-중세-근대'라는 역사 구분은 서구 중심적 사고일 뿐이며, 이집트·중국·인도·이슬람·서구 등 모든 문명은 각자의 역사와 생명 주기를 가진다고 보았습니다. 이는 서구를 세계사의 중심으로 바라보던 역사관을 뒤집는 새로운 시각이었죠.
Figure.17 아널드 토인비
아널드 토인비Arnold J. Toynbee는 이러한 관점을 더욱 발전시킵니다. 그는 40년에 걸쳐 『역사의 연구』를 집필하며 세계의 20여 개 문명을 비교·분석했고, 문명의 흥망성쇠를 설명하는 도전과 응전 이론을 제시했는데요. 토인비는 문명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은 인종이나 환경이 아니라 외부와 내부에서 닥쳐오는 도전에 어떻게 대응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보았습니다. 또한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는 창조적 소수자가 사회를 이끌 때 문명은 성장하지만, 이들이 창조성을 잃고 기존 권력만 유지하려 하면 문명은 쇠퇴한다고 설명했죠.
물론 이들의 이론에도 한계는 있었습니다. 슈펭글러는 문명의 흥망을 지나치게 운명론적으로 설명했고, 토인비는 모든 문명에 공통된 발전 법칙이 존재한다고 일반화했다는 비판을 받았죠.
Fig.14 인간의 역사만으로 충분한가? - 빅 히스토리
20세기 후반 역사학은 정치사와 경제사뿐 아니라 여성사, 노동사, 문화사, 미시사 등 다양한 분야로 세분화됩니다. 연구는 점점 더 깊어졌지만, 한편에서는 인간 사회만으로는 역사를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는 문제의식도 등장했는데요. 인간의 역사는 우주의 탄생과 지구의 형성, 생명의 진화 위에서 이루어진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역사학을 자연과학과 연결해 인류의 역사를 바라보려는 새로운 시도가 등장했는데, 이를 빅 히스토리(Big History)라고 하죠.
대표적인 역사학자 데이비드 크리스천David Christian은 인류의 역사를 약 138억 년 전 우주의 탄생부터 시작합니다. 그는 천문학, 지질학, 생물학, 진화론과 역사학을 결합해 별의 탄생과 지구의 형성, 생명의 진화, 인류의 등장과 문명의 발전을 하나의 연속된 이야기로 설명했는데요. 빅 히스토리는 국가와 왕조, 전쟁 중심의 역사에서 벗어나 인간을 우주의 긴 역사 속 한 존재로 바라보며 역사학의 범위를 크게 확장했습니다.
이와 비슷한 시기에는 역사학을 다른 학문과 결합해 인류 전체를 설명하려는 시도도 활발해집니다. 제러드 다이아몬드Jared Diamond는 『총, 균, 쇠』에서 문명의 차이를 인종이나 문화가 아니라 지리와 기후, 작물과 가축, 질병 같은 환경적 조건으로 설명했죠. 이어 유발 하라리Yuval Noah Harari는 『사피엔스』를 통해 인지혁명, 농업혁명, 과학혁명을 중심으로 호모 사피엔스가 어떻게 지구를 지배하는 종이 되었는지를 하나의 거대한 이야기로 엮었습니다. 두 저자는 역사학뿐 아니라 지리학, 생물학, 인류학, 경제학 등 다양한 분야의 연구를 종합해 인류 전체를 조망하는 새로운 역사 서술을 시도했죠.
물론 이들의 설명은 지나치게 일반화하거나 복잡한 역사를 하나의 원인으로 환원한다는 비판도 받습니다. 그럼에도 이들은 역사학이 개별 국가와 사건을 넘어 인간 사회 전체, 더 나아가 우주와 생명의 역사까지 함께 바라볼 수 있음을 보여주었죠.
권위를 정당화하는 기록으로 시작한 역사학은, 탐구와 검증을 거쳐 사회와 구조, 개인과 문명, 그리고 우주의 역사까지 품는 학문으로 발전해 왔습니다.
Reference.
- 존 H. 아널드. (2025). 역사. 교유서가
- 유시민. (2018). 역사의 역사. 돌베게
- 김서형. (2021). 처음 하는 역사학 공부. EBS BOOKS
- 존 루카치. (2018). 역사학 공부의 기초. 유유
- 이 글의 일부는 AI의 도움을 받아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