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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14일, 여자가 남자에게 초콜릿을 주는 이유

초콜릿 카카오나무 열매의 씨를 볶아 만든 가루에 우유, 설탕, 향료 따위를 섞어 만든 것. -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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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1 코코아말고 초콜릿

Figure.1 반 하우턴이 만든 코코아 압착기 ⓒchocovira.in
초콜릿을 코코아와 같은 액체가 아닌 형태로 먹은 최초의 기록은 1730년에 등장합니다. 사실 이 기록은 코코아를 만들 시간이 없을 때 코코아 덩어리를 베어 물고 액체를 마시는 야매(?) 방식이었고요. 진짜 초콜릿이 만들어지려면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합니다.
초콜릿이 등장한 배경을 알기 위해서는 코코아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기존의 코코아는 카카오닙스를 볶은 뒤 갈아 으깨 만든 카카오매스를 마시는 것이었습니다. 이때 추출한 카카오매스에는 지방분이 너무 많아서 표면에 뜬 기름을 걷어 내고 마셨죠.
1828년이 되어서는 단순히 표면에 뜬 기름을 걷어 내는 것이 아닌 압축기에 넣어 지방분을 짜내는 기술이 등장합니다. 네덜란드의 반 하우턴Van Houten 이 압착기를 만들어 낸 것이죠. 압착기로 짜낸 지방분은 카카오버터라고 부릅니다.
코코아에는 50% 이상의 카카오버터가 함유되어 있었는데 하우턴의 압착기를 이용하면 27%까지 낮출 수 있었죠. 지방분 함량이 줄어 건조해진 덩어리는 고운 가루로 만드는 것이 가능했습니다. 즉, 오늘날과 같은 코코아 가루를 만들 수 있게 된 것이죠.
반면 19세기 초, 약용으로 코코아를 제조하던 프라이가의 조지프 프라이Joseph Fry 가 하우턴이 빼낸 카카오버터를 다시 카카오매스에 추가합니다. 카카오버터의 양을 늘리자 더 많은 설탕을 녹일 수 있었고, 그 결과 쓴맛은 줄고 단맛이 강해졌죠.
이를 잘 섞어 응고하자 드디어 초콜릿이 탄생합니다. 참고로 반 하우턴에게 압착기를 구매했던 초콜릿 제조업자 중에는 캐드버리Cadbury 형제도 있었습니다. 캐드버리는 오늘날에도 초콜릿으로 유명한 기업이죠.

Fig.2 초콜릿 부드러워져라, 얍!

Figure.2 1867년 네슬레가 만든 분유 ⓒhouseofswitzerland.org
초콜릿이 등장하긴 했지만 당시의 초콜릿은 입자가 굵어서 입에 넣으면 까끌까끌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여전히 코코아를 더 선호했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처음 등장한 것이 밀크 초콜릿입니다. 밀크 초콜릿은 1876년 스위스의 약사 앙리 네슬레Henri Nestlé 와 코코아 제조를 하던 다니엘 페터Daniel Peter 에 의해 만들어지죠. 앙리 네슬레가 유아용 분유를 개발하던 중 페터에게 분유를 초콜릿에 넣어 볼 것을 제안합니다. 비싼 카카오 원두 대신 분유를 섞으면서 가격을 낮출 수 있었고, 식감도 매끈하게 개선할 수 있었습니다. 참고로 앙리 네슬레와 다니엘 페터는 오늘날에도 유명한 네슬레 기업의 창업자입니다.
초콜릿이 부드러워지는 데에는 루돌프 린트Rudolf Lindt의 공도 있었습니다. 1879년 그는 콘킹Conching이라는 제조 방법을 고안해 냅니다. 콘킹은 재료를 혼합하는 기계를 이용해 카카오매스, 카카오버터, 설탕, 우유 등을 장시간 섞는 방법을 가리킵니다. 콘킹을 거치면 초콜릿 입자가 작아져 부드러워지고 풍미도 훨씬 살아나죠. 이것이 현재 우리가 먹고 있는 초콜릿과 거의 흡사합니다.

Fig.3 초콜릿처럼 달콤한 직장

Figure.3 1950년대 라운트리 공장의 모습 ⓒNestlé
20세기로 접어들면서 초콜릿이 대량 생산되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몇몇 초콜릿 생산 기업은 대기업으로 성장하죠. 가장 주목할 만한 기업은 킷캣으로 유명한 론트리Rowntree’s입니다. 론트리의 직원은 1899년에 1,500명을 넘겼고 1920년대에는 5,000명 규모가 됩니다.
론트리는 규모뿐만 아니라 직원 복지에 관련된 여러 제도를 도입해 규모만 대기업이 아님을 증명합니다. 이는 라운트리 가문이 퀘이커교도 집안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기도 했죠. 라운트리 사가 행한 복지는 지금 봐도 혁신적인 것들이 많은데요. 몇가지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우선 론트리가 최초로 도입한 노동자 보장 제도는 주거 대책과 퇴직 연금이었습니다. 1904년 공장 인근 지역에 전원 도시를 건설해 노동자들에게 제공했고, 1906년 사업 초창기부터 근무한 직원이 퇴직할 시기가 되자 고령 연금 제도를 실시하죠. 1920년대에는 14~15세 여자아이들이 자신의 적성을 찾아 이직을 많이 한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이에 일이 끝난 뒤에 공부할 수 있도록 가정 수업, 요리 수업 등이 열었고, 교실, 도서관, 모임장 등을 만들어 높은 이직률을 개선하죠.
추가로 일에 지장을 주지 않는다면 작업 중 담소를 나누는 것과 노래를 부르는 것도 허용되었고, 공장에서 각종 대회와 댄스 파티가 자주 열렸습니다. 그 외에도 스포츠, 댄스, 연극, 목공 등의 동아리 활동을 격려했으며 직원들끼리 소풍이나 짧은 여행을 다녀오게 만들어 이를 사보에 싣기도 했죠.
임금도 프리미엄 보너스 제도라고 해서 기본급을 보장하고, 시간을 아껴서 작업을 많이 하면 그 작업에 대해 추가 급료를 지급했습니다. 1922년에는 근무 환경 개선을 위해 산업 심리학자가 정식 사원으로 채용되었고, 심리 테스트를 적용해 직원을 어느 부서에 배치할지도 고려했죠. 이게 모두 1920~50년대의 일이라는 것이 상당히 파격적입니다.
참고로 앞서 언급한 캐드버리 사도 퀘이커교도 집안에서 시작되어 현재에도 사회적 기업의 모델이 되곤 합니다. 안타깝게도 현재에는 다국적 대기업 자본의 공격적인 세계화 과정에 편입되고 말았지만요.

Fig.4 유명한 초콜릿들의 탄생

키캣 Kitkat
Figure.4 KitKat ⓒcreativemoment.co
이러한 갓기업 론트리에서 1935년 키캣을 출시합니다. 처음에는 키캣이 아니라 초콜릿 크리스프라는 이름이었죠. 키캣은 잘 아시다시피 여러겹의 웨이퍼 사이에 크림을 넣고, 초콜릿 코팅을 해 만든 초콜릿 가공과자인데요. 쉽게 잘라먹을 수 있는 홈이 나있는 것이 특징이죠. 이 홈은 바쁘게 일하는 노동자가 잠깐 쉴 때 빠르게 먹을 수 있도록 고안한 것이라고 하네요. 킷캣이라는 이름은 퀘이커교가 지지하는 런던의 휘그당 모임명(킷캣 클럽)에서 따왔다고 합니다.
허쉬 Hersey
Figure.5 1930년대의 허쉬 상품들 ⓒexplorepahistory.com
미국 초콜릿 산업은 허쉬 Hersey 에서 시작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밀턴 스네이블리 허쉬Milton Snavely Hershey 는 원래 캐러멜과 과자 등을 만들어 팔았었는데요. 1893년 시카고 세계 박람회에서 초콜릿 제조 기계를 보게 됩니다. 이 기계를 구매해 캐러멜에 초콜릿을 입힌 과자를 팔기 시작하면서 초콜릿 제조에 뛰어들죠. 이후 허쉬는 컨베이어 벨트를 갖춘 공장에서 대량 생산하게 되고, 1907년 키세스Kisses 가 큰 인기를 얻으며 미국 전역에서 가장 유명한 초콜릿 회사 중 하나가 되죠.
M&M’s
Figure.6 M&M 초콜릿 ⓒconfectionerynews.com
포레스트 마스Forrest E. Mars는 스페인 내전에서 녹는 것을 막기 위해 단단한 설탕 껍질에 싸인 초콜릿을 보게 되는데요. 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1932년부터 영국에서 전투 식량으로 쓰일 초콜릿을 제조하기 시작합니다.
미국에 들어온 마스는 2차 세계대전 중 초콜릿과 설탕이 부족할 것으로 예상해 이를 공급받을 수 있도록 허쉬와 손을 잡게 되는데요. 그래서 회사명을 허쉬의 사장인 윌리엄 머리William F.R. Murrie 와 본인의 이름, 마스의 앞 글자를 따 M&M으로 명명하게 됩니다. 그리고 1941년 첫 제품을 출시하죠.
M&M의 초콜릿은 애초에 전투 식량으로 만든 것이기 때문에 극한의 환경에서 가져가기 좋았는데요. 따라서 1981년 NASA의 첫 우주왕복선인 콜롬비아호에 M&M 초콜릿이 실리면서 우주에 간 최초의 초콜릿 타이틀을 얻게 되었습니다.

Fig.5 발렌타인데이에는 왜 여성이 남성에게 초콜릿을 주는 걸까?

Figure.7 성 발렌타인 주교 ⓒpetaluma360.com
3세기 로마의 황제였던 클라우디우스 2세가 미혼 남자를 더 많이 입대시키기 위해 결혼을 금지했는데요. 성 발렌타인 주교가 이를 어기고 군인들의 혼인을 집례했다가 처형당하게 됩니다. 처형이 집행된 날이 2월 14일이기 때문에 발렌타인 주교를 기리기 위해 사랑하는 사람에게 선물을 주는 발렌타인데이가 시작되었다고 알려져 있죠. 그런데 선물이 언제부터 초콜릿으로 굳어지고, 왜 하필 여성이 남성에게 주는 날로 변한 걸까요?
Figure.8 1936년 고베 모로조프 제과의 발렌타인 초콜렛 광고 ⓒppss.kr
발렌타인데이에 초콜릿을 선물하자고 처음 제시한 곳은 1936년 일본 고베의 ‘고베 모로조프 제과’입니다. 당시 일본에서는 선교사를 비롯한 서양인들에 의해 발렌타인데이가 자리 잡고 있었는데요. 이를 본 고메 모로조프 제과에서는 “고마운 분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담아서 발렌타인 초콜릿을 전합시다”라는 이벤트를 합니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그다지 성공하지 못했다네요.
Figure.9 메리쵸코의 발렌타인 초콜릿 ⓒppss.kr
전쟁 이후인 1958년 도쿄의 메리스 초콜릿에서 또다시 밸런타인데이를 노리고 초콜릿을 판촉하는 이벤트를 진행합니다. 당시 메리 쵸코에서는 주로 남자가 선물하고 받는 것은 여자인 상황을 역발상해 “밸런타인데이에는 여성이 남성에게 초콜릿을 선물해요”라는 캠페인을 진행합니다. 하지만 이 캠페인도 크게 성공하지는 못했죠. 1960년에는 대기업인 모리나가 제과에서 밸런타인데이 판촉행사를 하지만 이 역시 크게 성공하지는 못했습니다.
본격적으로 여성이 남성에게 초콜릿을 선물하게 된 계기는 페미니즘과 관련이 있습니다. 남녀 차별이 심하고 가부장적인 사회였던 일본에 1963년경부터 페미니즘이 크게 퍼지게 됩니다. 그리고 이들 사이에서 여자도 적극적으로 남자에게 선물을 주고 고백할 권리가 있다는 관점에서 발렌타인 초콜릿이 유행하게 되죠.

Fig.6 고종 때 처음 들어온 초콜릿

Figure.10 1972년의 해태의 나하나 초콜릿 광고 ⓒ경향신문
우리나라에 처음 초콜릿이 들어오게 된 데에는 몇 가지 설이 있는데요. 아관파천 때 독일인 통역사인 손탁이 고종에게 초콜릿을 전해줬다는 설과 러시아 외교관 부인이 명성황후에게 화장품과 함께 초콜릿을 전해줬다는 설 등이 있습니다. 물론 일반인이 초콜릿을 처음 접한 건 6‧25 전쟁 때 미군에 의해서죠.
1967년이 되어서야 해태제과에서 나하나 초콜릿을 직접 제조합니다. 1970년 전후로 수많은 초콜릿이 등장하는데 1968년에는 오리온에서 넘버우너(원) 초콜릿, 1975년 롯데에서 가나 초콜릿 등이 출시되었죠.

Insight.

초콜릿의 역사를 살펴보면 초콜릿 사업을 퀘이커교도들이 운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캐드버리 사와 라운트리 사가 대표적이죠. 종교적 이유로 금지된 술을 대체하기 위해서 코코아를 사용했었거든요. 그리고 이들이 대기업이 되면서 복지 등의 측면에서 사회적으로 좋은 영향을 끼쳤고요.
그러고 보면 창업자의 사상이 기업의 방향이나 복지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끼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재밌는 것은 창업자가 그런 사상을 가지고 있던 당시 시대적 배경과는 별개로 계속해서 적용된다는 점이죠. 무슨 말이냐면 라운트리 창업자가 퀘이커교도 적마인드를 갖게 된 당시 시대적 배경과 이유가 있을 것이지만, 그 시기도 지나고 퀘이커교를 유지할 이유도 사라졌음에도 론트리 회사의 사상은 유지되었다는 것이죠.
우리나라 기업에 대입해본다면 고도성장기에 '하면 된다'라는 식의 정신으로 기업을 창업해 성장시킨 창업자의 마인드는 국가적 성장이 끝난 시기에도 회사 구성원들에게 강요된다는 것이죠.

Reference.

다케다 나오코. (2017). 초콜릿 세계사. AK
정한진. (2006). 초콜릿 이야기. 살림
정명교. (2020). 우리나라 제과 산업의 역사. 식품과학과 산업, 53(3), 295-306.
Laura Schumm. (2019). Six Times M&Ms Made History. URL: https://www.history.com/news/the-wartime-origins-of-the-mm
김상하. (2014). 발렌타인 초콜릿의 ‘진짜’ 유래와 역사. ㅍㅍㅅㅅ. URL: https://ppss.kr/archives/17578
M&Ms 공식 홈페이지. URL: https://www.mms.com/en-us/history